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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y 07. 2021

목적 없는 의지

- 영화 『소울(Soul)』 (2021)

  하이데거는 일상의 생활세계를 규정하는 원리를 설명하며 잡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우리 삶을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일상이란 무의미한 잡담의 세계라고 말하였다. 그에게 일상의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잡담이란 인간들에게 자기 삶의 본래성을 상실하게 하는 힘이다. 실제 우리의 삶은 잡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는 끊임없이 성과를 요구하고 성공의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들의 인정을 욕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침마다 눈을 뜨고 확인하는 진실은 잡담의 생활세계로부터 벗어나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삶의 아이러니는 잡담의 세계를 의식적으로 부정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잡담의 세계와 단절해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잡담의 세계를 쓰레기통에 비우면 우리의 일상은 본래성을 회복할까? 하이데거 입장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에 속박된 우리가 일상을 벗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삶의 아이러니는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자신의 무력(無力)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합리화하도록 이끈다. 그렇지만 영화  『소울(Soul』 (2021)은 우리 삶의 시간들이 정말로 무가치한지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무심히 지나쳤던 시간과 타자들의 세계가 잡담의 무의미로 점철되었는지 되묻는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셸 프루스트가 마들렌을 마시다가 불현듯 자기 기억 속에 잠재되었던 ’콩브레‘를 떠올리며 잃어버린 시간의 아름다운 진실을 되찾는 것처럼 우리가 앞서 경험하고 지나온 시간 안에는 수많은 행복의 순간들이 내재한다. 다만 우리는 일상에 휩쓸려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시간은 각자가 경험만큼 다양한 비밀을 품고 있으나 시간의 비밀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시간의 비밀이란 어느 가을날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이 가져다준 정취이거나, 무심한 하늘의 창연함이 될 수도 있고, 추운 겨울 카페에서 떠먹는 초콜릿 케이크의 달콤함의 형태일 수도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순간의 경험이 당신 인생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을 영원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타이틀 소울(Soul)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음악의 장르로서 Soul과 영감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의미는 우리 내면을 관통하는 삶의 태도로서 영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주인공 조 가드너를 재즈(jazz) 피아니스트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실수로 맨홀에 빠져 죽음의 세계로 추락하면서 시작된 모험이 조 가드너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소울의 두 가지 의미 맥락이 내러티브에 적절히 뒤섞여 있다.


  재즈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녔으나 매번 오디션에서 떨어지던 조 가드너는 우연히 한 재즈클럽의 오디션을 통과하면서 드디어 무대에 설 기회를 얻는다. 자신의 꿈을 이룰 기회를 얻은 조 가드너는 꿈에 취해 길을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맨홀에 빠지고 만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그가 도착한 곳은 지구의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영혼들이 모여 자기 불꽃을 찾으려 훈련받는 곳이다. 제드에 의해 관리되는 영혼의 세계에서 조 가드너는 시니컬한 영혼 22호의 멘토로 임명된다.


  자기 꿈을 이룰 기회를 얻은 조 가드너는 다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영혼 22의 불꽃을 찾아주고 지구로 가는 통행증을 받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조 가드너는 현실로 돌아오지만 정작 자신은 고양이가 되어버리고 영혼 22는 조 가드너의 몸에 빙의된다. 그렇지만 재즈클럽의 무대 공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조 가드너는 영혼 22호를 구슬려서 자기 대신 재즈 공연에 참석하도록 유도한다. 과연 조 가드너는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될까?


  우선 영화 『소울』 은 고양이에 빙의한 조 가드너가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실을 재인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제3자의 눈으로 나 자신과 주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권유한다. 영화 속에서 고양이가 되고서야 조 가드너는 자신의 이발사 친구가 수의사를 희망했지만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발사가 되었다는 사실과 항상 자신의 꿈을 부정하던 어머니는 사실 그가 자기 음악을 사랑했으면 하고 바랐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만약 고양이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면 조 가드너는 평생 그들을 오해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또한 이 작품은 영혼 22의 물음을 통해 삶의 목적이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조 가드너의 몸에 빙의해 처음으로 인간의 삶을 경험한 영혼 22호가 자기 불꽃의 목적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자 조 가드너가 답한다. “하늘을 보거나 걷는 건 목적이 아니야. 그냥 사는 거지.” 우리는 언제나 자기 삶에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목적이 우리 삶에 의미를 만들어주는 것일까? 정작 목적은 우리 삶을 왜곡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삶에 의미를 짓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삶을 향한 의지이다. 나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을 수용하며 자기 삶의 잠재성을 끌어내고자 하는 긍정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 존재의 의미는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생의 의지를 통해서만 무한히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 가드너는 정작 영혼 22에게 해주었던 자신의 대답을 망각한다. 그는 영혼 22호에게서 자신의 몸을 되찾자 재즈클럽에서 최고 연주가로 인정받는 것이 자기 삶의 불꽃(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꿈에 그리던 재즈클럽 무대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함으로써 자기 꿈을 이루는 것처럼 보였으나 무대가 끝나고 허무감에 젖는다. 그는 갑자기 찾아온 허무감을 토로하며 밴드 동료인 섹소포니스트 도로테아에게 묻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들려준다.


  “평생 바다를 그리워했던 어린 물고기가 물었죠. 바다로 가고 싶어요. 바로 여기가 바다란다. 여기는 바다가 아니라 물일뿐인 걸요. 그래, 넌 이미 바다에 있는 거란다.” 이 우화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꿈꾸는(욕망하는) 대상(삶의 목적/무대)이 사실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어린 물고기가 자신이 살아가는 물속이 바다임을 믿지 않고 자기 주관이 만들어낸 바다의 이미지만을 진정한 바다라고 주장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조 가드너가 상상하고 꿈꾸던 재즈클럽의 무대가 주는 희열(喜悅)이란 어디까지나 그가 만든 환상일 뿐이다. 그가 데뷔한 무대도 고된 삶의 일상에서 벗어난 장소가 아니다. 그가 추구한 삶의 목적은 환상일 뿐 중요한 것은 재즈를 지속하는 것 그 자체이다. 이 우화가 말해주는 진실은 빈 무대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어떠한 경우에도 삶 그 자체를 긍정하는 의지만이 삶을 지속시킨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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