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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Oct 04. 2016

윤리적 당위와 순환논리의 드라마

-김지운 감독의 <밀정> (2016)

김지운 감독은 스타일리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서사의 매력을 보여주면서도 화면의 미장센을 놓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장화, 홍련> (2003), <달콤한 인생> (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 <악마를 보았다> (2010) 등등 그가 연출한 영화들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어둡고 차갑다.

  영화 <밀정>은 기존에 보여준 감독의 스타일대로 인간의 내면 심리 변화를 절제된 분위기 속에 담아냈다.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이 의열단장 정채산을 잡기 위해 의열단원 김우진과 접선했다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하는 과정을 다룬다. 초반 친일파로 보이던  이정출은 서사의 전개 과정에서 적과 동지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폭탄을 경성까지 반입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만 역으로 김우진을 비롯한 의열단을 검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상황의 아이러니가 이정출이 서 있는 자리의 경계성을 잘 보여준다.  

  이 같은 영화의 관점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았던 기존의 작품들과 구별된다. 가까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했던 최동훈 감독의 <암살> (2015)의 경우만 해도 민족과 반민족의 대결 구도로 서사가 진행된다. 안옥윤으로 대변되는 민족지사에 의해 변절자 염석진이 응징되는 모습을 통해 실제 역사의 한계를 상상적으로 극복한다. 반면 영화 <밀정>은 이정출의 내면 변화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이분법적 대결 구도를 상대적으로 희석시킨다.

  분명 이러한 감독의 시도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았을 때 이정출의 갑작스러운 내면 변화가 설득력을 지는가 하는 부분은 의문이 생긴다. 이정출의 내면 변화는 어떤 기능적인 그러니까 당위적인 명제 앞에서 쉽게 무장 해제된 경향이 없지 않다. 작품 속에서 정채산은 이상적 인물로 그려지며 일종의 윤리적인 당위를 제시한다. 그의 애국심과 민족애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허락되지 않는다. 정채산은 영화가 말하고 싶은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분명한 하나의 관점과 가치를 구현한다.  

  그는 이정출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당위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관객의 내면을 파고든다. 정채산은 이정출과 밤낚시를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사람들 말은 물론이고 내 말도 믿지를 못하겠소. 다만 저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정채산의 말을 통해 드러나듯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독립운동은 조선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이정출의 내면이 동요하게 된 이유는 바로 정채산이 제시하고 있는 윤리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비루함 혹은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또한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가 부정할 수 없는 조선인이라는 순환 논리에 근거한다.

  하지만 과연 정채산이 강조하고 있는 당위가 이정출을 조선인으로 변화시키는 데 설득력을 지니는지 의문이다. 영화 초반 곧바로 이정출이 상해 임시정부를 배신한 이유가 제시된다. 바로 조선이 독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민감한 현실 감각을 지니고 있는 이정출이 정채산에 의해 제시되는 윤리적 당위에 설득된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영화는 윤리적 당위를 강조함으로써 발생하는 서사의 결함을 송강호라는 배우의 연기와 연출력으로서 보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밀정>은 마지막까지 관객의 윤리적 감각을 일깨우는 교훈적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정채산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라며 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분명 목소리가 전해주는 메시지의 현재적 의미는 곱씹어봐야 하지만 윤리적 메시지의 과잉이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봉합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고려대대학원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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