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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lie Dec 06. 2023

[하루] 성장

2013. 4. 11 pm 2:59

  이제 20개월에 접어든 딸아이는 말을 내뱉고 새로운 단어를 듣는 재미에 빠져있는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책을 골라와 내 무릎에 앉고는 응, 응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림들을 가리킨다. 그럼 나는 몇 번이고 그 응, 응 에 답하며 천천히 단어를 말해준다. 세상 모든 것들이 처음 보는 것이고, 처음 듣는 것이고, 처음 만지는 것인 딸아이에게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움의 연속일지. 내가 뱉은 단어를 따라 하는 딸아이의 표정은 잊지 못할 것이다.


  하루는 딸아이가 ‘엄마’도 하고 ‘딸’도 발음하기에 ‘엄마 딸’라는 단어를 알려줬었다. 

  -우리 혜원이 누구 딸? 그럼 ‘엄마 딸’하는 거야. 자, 해 봐 봐.

  한참 내 입모양을 쳐다보던 딸아이가 앵두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어... 어...

  그렇게 몇 번 소리 내는 것 같더니 어려웠는지 멋쩍게 웃으며 내 무릎에 얼굴을 폭 묻어버렸다. 마치 처음 발음하는 소리가 낯선 탓에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인 것도 같았다. 그때 알았다. 딸아이에게는 모든 게 처음이고 낯설어서 호기심이 이는 동시에 두려움도 느낀다는 것을. 홀홀 작고 말랑한 여린 몸으로 세상에 나와 마주하게 되는 것들이 어찌 신기하고 즐겁기만 할 수 있을까.


  가끔은 딸아이가 벌써 자신의 한계를 가늠하고 있는 듯 느껴질 때도 있다. 바지에 두 다리를 꿰어 넣는 것이나 무거운 것을 옮기려 할 때 읏차, 힘을 주는 시늉을 하다가 엄마, 한다. 엄마가 해달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으레 자신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엔 엄마를 찾는다. 벌써부터 한계를 맞닥뜨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판단하는 딸아이를 보면 저 작고 조용한 몸 안에서 휘몰아치는 인간의 고독한 성장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아찔할 때가 있다.


  정말 휘몰아치는 것 이상으로 딸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 마치 흡수해 버리듯 자신의 세상을 조금씩 넓혀가며 빨아들이고 있다. 내가 하루에 0.2배씩 퇴화되는 반면 딸아이는 20배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는 듯하다. 태어난 지 20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딸아이는 그새 걷고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법을 익혔고, 태어난 지 30년이 지난 나는 그러한 기본적인 것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동안 익히고 배운 것을 하나씩 잊어버리고 있었다.


  딸아이의 눈부신 성장과 흡수력에 나 또한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듯 놀라울 때가 있다. 아이의 눈으로 아이의 생각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엔 나조차 알지 못했던, 무심히 지나쳤던 신세계의 영역이 분명 있었다. 그곳엔 두려움을 이겨내고 놀라움을 얻어낸 딸아이의 작지만 위대한 노력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집에서 딸아이만 보고 살림을 하다 보면 아이의 세상은 커져가는 반면 내 세상은 점점 좁아진다는 불안감에 몸서리 쳐질 때가 있다. 내 생각의 폭도 판단의 속도도 좁고 느려지는 것 같은 퇴행의 두려움. 하지만 딸아이를 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딸아이의 키만큼 몸과 마음의 쓸데없는 부피를 줄이려는 생각. 딸아이의 눈높이와 판단의 속도에 맞춰가고 있다는 생각. 그래서 딸아이의 성장을 함께 지켜보며 함께 크고 있다는 생각.


  내 세상이 줄어든 건 아직 좁은 세상을 지닌 딸아이를 이해하기 위함이고, 사고가 느려진 건 딸아이의 생각 끝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 위함이라고. 그래서 유치하고 시시한 농담과 유머에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고, 다른 사람의 눈물에도 괜히 코끝이 찡해져 눈시울이 붉어지고, 촌스러운 꽃무늬와 화사한 그림에 기분이 좋아지는……. 그래서 느리게 걷고 느리게 말하고 느리게 생각하며 어린 여자아이의 감성을 닮아가고 있는 건지도.


  어쩌면 내가 딸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지나 온 어린 시절을 혹은, 아직 자라지 못한 그때의 감정들을 키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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