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읽었던 책을 세월이 흘러 다시 읽는 것을 좋아한다. 세월이 흘렀다는 건 시간의 의미보다 나에 대한 어떤 변화의 의미가 크다. 어떤 식으로든 변해버린 내가 읽는 건 그때와 같은 글자와 내용이겠지만, 받아들이거나 다가오는 감동의 느낌은 마치 거대한 해일과도 같다. 그 해일이 오래도록 깊게 나를 덮치는 충격을 이상하게도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떻게 이 놀라운 걸 그땐 모를 수가 있었지? 하고.
책을 읽은 후 시간이 오래 지나면 한두 가지의 단어나 이미지가 그 책에 대한 그리움처럼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책장의 오래된 책 중 이 책을 다시 집어든 건, 오로지 제목 때문이었다. 거의 20년 만에 마주한 이 책에 대해 떠오르는 아련한 추억도 없이 무겁고 심오한 제목만 남아버린 책.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책은 신림동의 어느 중고책방에서 구매한 1997년 신정판 17쇄 단행본이다. 그 시절의 나는 골목을 헤매다 중고책방이 보이면 숨어 들어가 낡은 종이 냄새를 오래 맡곤 했었다. 그러다 사람의 손때가 최대한 덜 묻은 책을 골라서 샀다. 여기저기 떠돌다 온 책 중에는 여기저기의 취향으로 알록달록한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무심한 그림과 메모가 남겨져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그어놓은 밑줄과 그림과 메모에 마음을 뺏겨 그 흔적을 남긴 이들의 마음에 자꾸만 가닿으려 해 도무지 책 읽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중고책을 사던 습관의 이유 중 하나는 마음껏 밑줄과 그림과 메모를 남길 수 있어서였다. 누군가의 책 읽는 시선을 빼앗을 리도 없고, 다시 되팔 것도 아니니 가능했다. 새책은 책의 커버와 띠지까지 늘 새것처럼 유지해야 하는 강박적 성격상 중고책은 나름의 돌팔구이자 나만의 일탈인 셈이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게 밑줄을 긋게 되는 문장이 생겼다. 마치 보물 찾기처럼 새로운 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책의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스무 살 초반의 나에겐 당장 눈앞의 현실이 버거웠고, 영원한 재귀나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건 높고 알 수 없으며 어렵고 먼 이야기였으므로.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이 모든 걸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조금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일 뿐이다.
스무 살 초반에 작성한 독후감엔 주인공들의 불륜과 외도, 자유연애가 이해되지 않으며 불편했고 대립되는 사상과 정치적 갈등은 소설을 감싸는 부수적인 환경의 문제라고 여겼었다. 지금도 토마스와 사비나의 자유연애나 프란츠의 불륜은 불편하지만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상황의 중요성과 존재에서 비롯된 필연적 사건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하나의 유기체로 다가온다. 과거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을 현재의 자신에게 투영하는 테레사나 자신의 부인에게 투영하는 프란츠. 어린 시절 엄격하고 편협한 아버지를 배반한 후 배반의 연속에 살게 된 사비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현재의 환경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받고 고통받는 존재들. 등장인물들을 감싸거나 내몰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어쩌면 바닥부터 켜켜이 쌓여 하나의 존재와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낸 건 아닐까. 아들과 아내를 떠나 오롯이 독신자로서의 자유를 갈망했던 토마스가 우연 속에서 만난 테레사에게 죽음의 순간까지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게 된 것처럼.
스무 살의 나는 주어진 상황과 도래한 결과 속에서 인물을 판단하고자 했고, 지금의 나는 판단보다 유보하고자 했다. 그들은 인생의 파도 속에 휩쓸려 살아왔을 뿐이라고.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볍고 가벼워서 일렁이는 작은 물결에도 저 멀리 떠밀려 살 수밖에 없었노라고.
이번 독서에서 새롭게 느낀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에서 사비나와 프란츠가 보여준 극명한 상반됨이다. 같은 것을 두고도 두 사람은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였다. 둘 중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다름의 문제. 출신과 살아온 환경이 다른 두 사람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 극렬히 다르게 받아들여졌고 결국 함께 할 수 없었다. 작가는 그것을 내용에서 "그들이 보다 더 오랫동안 함께 있었더라면 그들은 서로가 했던 말들을 아마도 이해했을 것이다. 마치 수줍어하는 두 연인들처럼 한쪽 편의 어휘가 부끄러워하면서 서서히 다른 편의 어휘에 접근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 편의 음악이 다른 편 음악에 동화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너무 늦었다(p.154)"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시간과 이해의 문제일 수도 있다. 역시 출신과 살아온 환경이 달랐던 토마스와 테레사는 서로의 다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그 사람의 일부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래서 그들에겐 다른 편의 어휘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다른 편의 음악에 동화되어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토마스와 테레사의 반려견인 카레닌에 대한 이야기이다. 강아지가 등장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카레닌은 두 사람의 시간 속에 매우 중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행복과 불행 속에서 늘 카레닌이 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카레닌의 사라진 미소가 함께했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 가장 마음이 쓰였던 인물(?)이 바로 카레닌이었다. 카레닌의 시간은 그들의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갔지만, 그들의 삶을 유유히 관통해 흐르고 있었다.
세 번째는 작가의 무서운 통찰력이다. 이 모든 세계관과 인물들의 인생관을 꿰뚫는 그의 시선이 나 또한 뚫어버릴 듯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6부 '대장정'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냉철하고도 섬세한 분석은 이 소설의 정점이 아닐까 감히 추켜 세워본다. 그중 23번에 등장하는 시선의 종류에 대한 내용은 비로소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를 완성하게 만들었다.
오래전 읽었던 책이 연락 끊긴 오랜 친구의 얼굴처럼 가물가물해질 때쯤 다시 꺼내 읽게 되면, 익숙한 얼굴이 반가우면서도 친구의 새로운 모습이나 변화를 발견해 가며 놀라게 된다. 오랜 그리움이 반가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책을 다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점에 갔더니 밀란 쿤데라의 추모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7월 12일 향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한 작가의 사진과 집필했던 많은 책들로 추모공간이 꾸며져 있었다. 한참 멈춰 서서 작가의 사진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는 왜 20년 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읽고 싶었을까. 생전 본 적은커녕 스친 적도 없는 작가가 순간 고맙고 놀라웠다. 지금까지 작가가 생존해 있었다는 걸 알지 못한 사실이 놀라웠고, 마지막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아 왠지 고마웠다)
" 당신이 세상을 떠나던 순간에 나는 당신의 책을 읽고 있었어요. 지금도, 그 이후에도 누군가 당신의 책을 읽고 또 읽게 되겠지요. 당신의 깊고 무거운 작품들을 읽는 이들의 가벼운 숨결 속에서 부디 편히 쉬시길..."
아무렇게나 그어놓은 연필 자국이 오랜 기억 같아 마음에 든다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더 땅에 가깝다. 그것은 더욱더 실제적이고 참된 것이다. (p.11)
무거움, 필연성, 가치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p.45)
현기증이란 허약을 통한 도취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허약을 의식하고 허약을 막으려 하지 않고 그것에 복종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어 더욱더 허약하게 되고자 한다. 어떤 장소의 가운데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쓰러지고자 한다. 맡에, 밑보다 더 깊은 곳에 있고자 한다. (p.96)
사람이 추적하는 목적은 언제나 베일에 가려 있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에 대해 꿈꾸는 젊은 처녀는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꿈꾼다. 명예를 좇는 젊은이는 명예가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전혀 미지의 것이다. (p.151)
인간 자아의 유일무이성은 그 자아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 바로 그 속에 숨겨져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 보편적인 것뿐이다. 자아에서 개체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과 구분되는 것이며, 처음부터 평가될 수도, 추정될 수도 없는 것, 다른 사람에게서 비로소 들추어내고 찾아내고 정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p.240)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맴돌지 않고 직선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왜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가 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반복을 갈구하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p.361)
이 슬픔은 <우리는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p.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