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바로 저예요
내가 전공의로 근무하던 병원의 분만실에는 저녁마다 '예비 미역국'이 1인분 준비되어 있었다. 힘겨운 출산을 마친 산모에게 미역국 한 그릇 대접해주지 않는 것은 우리네 정서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그런데 밤 사이 분만이 언제 일어날지는 미리 알 수 없으니, 일반적인 병원 식사처럼 미리 수량에 맞춰 준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비로 미역국을 한 상씩 차려 두고, 시간이 지나도 아기가 태어나지 않으면 폐기했다. 폐기가 확인된 미역국은 분만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먹을 수 있게끔 탕비실로 넘어왔는데, 미역국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게는 기분 좋은 '득템'이었다. 밤샘 당직을 서다가 마땅한 야식이 없을 때는 푹 고아낸 산모 미역국이 꿀맛이었다. 내가 전공의 4년 내내 가장 많이 먹은 병원밥은 다름 아닌 미역국이었다.
그런 내가 막상 내 애를 낳고 나서는 미역국을 못 먹는다. 한국식 산후조리의 상징과도 같은 미역국, 그렇게 좋아하던 미역국에 입도 안 댄다. 뜨끈하고 짭조름한 국물은 먹지 않고, 꼭 먹고 싶으면 미역 건더기만 조금 건져 먹는다. 영양가가 많아 보이는 기름진 음식도 안 먹는다. 윤기가 자르르 도는 고기반찬이 나와도 퍽퍽한 부분만 잘라먹는다. 산모에게 많이들 권하는 온찜질, 온열 마사지도 하지 않고 오히려 수시로 냉찜질을 해댄다. 혈액 순환이 잘 되게끔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면 좋다고들 하지만, 나는 물조차도 함부로 마시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산후조리원의 '청개구리'다. 하지만 내가 대세를 거스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모유 과다 산모다. 출산 후 심한 유방 울혈이 지속되고, 젖양도 신생아가 먹을 수 있는 양을 배로 넘어선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울혈과 모유양을 조절하고 유관 막힘이나 유선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염분, 수분, 지방 공급을 어느 정도 제한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산후조리원이 매일같이 내어주는 뜨끈한 국물 음식, 기름진 반찬, 따끈한 차를 못 본 척하며 되도록 자제하는 중이다.
미역국 자체는 물론 산모에게 좋은 음식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알맞지 않다. 꼭 '미역'국이 아니더라도, 국물 음식을 생각 없이 훌훌 먹다 보면 자칫 모유가 더 많아진다. 대신 수시로 냉찜질을 해주면서 유축/수유 간격도 일부러 조절한다.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산후조리 마사지'라는 호사를 누려보고 싶은데, 엎드려서 마사지를 받으면 유방 울혈이 더 심해져서 꿈도 못 꾼다. 이런 나를 보는 남편은 갸우뚱했다. 조리원에서 해주는 온갖 좋은 서비스와 음식을 다 마다할 거면, 대체 조리원에 왜 왔냐며... 그러게나 말이다!
모유가 모자라서 속 태우는 산모들도 많다. 모유 과다라니,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든지 적당해야 좋은 법. 유방 울혈, 유선염, 유관 막힘, 아기의 수유 거부처럼 모유 과다가 일으키는 문제도 많다. 다만 모유 과잉이 생소한 것은, 이런 산모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10% 안쪽으로 추산된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산후조리 환경은 언제나 모유 촉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산모의 젖이여, 펑펑 돌아라! 매 끼니 국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뜨끈하게 찜질과 마사지를 하고, 유축과 수유를 최대한 자주 하는 것은 모두 모유를 더 잘 나오게 하는 방법이다. 나 같은 소수자는 '일반적으로' 산모에게 권장되는 것들이 아니고, 자신의 특수한 컨디션에 알맞은 환경을 잘 찾아내야 한다.
의사이기에 앞서 한 명의 산모로서, 미역국이 산후조리에서 얼마나 각별한 위상을 차지하는지 잘 알고 있다. 매일 밤 폐기를 감수하고서라도, 혹시 모를 산모를 위해 분만실에 예비 밥상을 따로 준비해두어야 할 만큼. 그렇게나 절대적인 미역국조차, 누군가에게는 삼가야 할 음식일 수도 있다. 생각할수록 참 신기한 일이다. 아기를 낳는다는 경험은 이토록 다양하다. 다들 비슷할 것 같지만 사람마다, 출산마다 완연히 다를 수도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를 따고, 분만 병원에서 일하고, 이제는 애 둘을 낳았는데도 매일 새롭게 배운다.
어디 산후조리뿐이겠는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획일적인 정답은 없다. 그러니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산모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미역국이 되었든, 보약이 되었든, 조리원이 되었든, 남들이 권하는 것들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의 경험은 제각각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경로를 밟기도 한다. 그러니 산후조리의 시작도 자신의 신체와 상태를 잘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통상적인 지침도 가치있지만, 나 자신의 상태보다 우선될 리는 없다. 미역국을 못 먹는 나도 조금씩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 아닐까? 극한의 젖몸살을 지나 이제는 유방 울혈이 얼마간 호전되었고, 수유 양이 아기와 맞춰지고 있다. 식사를 양껏 못하거나 마사지를 못 받아도, 나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산후조리이다. 필요하다면, 그대도 부디 '청개구리 산모'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