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 3'과 '28년 후'가 노잼인 공통의 이유

※강스포주의※ 내 가족도 아닌 ■■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

by 오지의

이제 앉아만 있어도 엉덩이가 빠개질 것 같은 병든 노산모에게는 미디어 감상도 아주 신중한 일이 된다. 까다롭게 고르고 골라서 넷플릭스 부동의 흥행 시리즈 '오징어 게임 3'과 전작들의 혈통이 훌륭한 좀비물 '28년 후'를 봤다. 남편은 막달 태교(?)를 이런 잔혹극으로 하는 것에 조금 찜찜해하긴 했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와 '진격의 거인'을 보며 품고 기른 첫째도 평범한 인간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면... 뭐, 임산부라고 해서 좋아하는 장르를 포기할 이유는 없는 모양이다!


정작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은... 둘 다 썩 재미있지가 않았는 것이었다. 어렵게 짬을 냈건만, 아무래도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내가 임신 중이자 산부인과 의사인 탓에 시선은 자연스레 두 작품에 등장하는 임산부와 그들의 출산에 맞춰졌다. "그렇게 얌전하게 가만있는 신생아가 어딨어? 애 안 키워본 모양이네." "진통하자마자 애가 너무 금방 나와. 말이 안 되지." 사실 디테일은 차치하고서라도, 신기하게도 두 작품이 비슷한 지점에서 설득력이 크게 떨어지면서 몰입이 깨져버렸다. 바로 '타인의 아이를 위한 과도한 희생'이라는 설정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다루는 내용은 핵심 플롯을 포함하니, 작품을 감상할 계획이 있다면 여기서 멈추기를 권한다.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인 '오징어 게임 3'에서 임신 중인 참가자를 돌보는 장금자의 헌신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혈연 관계도 없는 산모를 위해 자신의 친아들을 찌르기까지 할 정도로! 좀비로 황폐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28년 후'의 아일라 역시 마찬가지다. 감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좀비 임산부의 출산을 돕고, 신생아를 제 아이처럼 돌본다. 흠... 아무래도 너무 비상식적이다. 생존이 우선인 극한 상황에서조차, 남의 아이를 위해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를 수 있을까?


다만, 작품 속 극단적인 설정을 조금만 걷어내고 찬찬히 살펴보자. 생판 남인 산모와 그 태아를 기꺼이 돌보고 헌신한다? 흔히 일어날 법하지는 않을지언정, 따지고 보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작중에서 묘사된 희생의 크기가 너무 거대해서 그렇지, 이런 정서 자체는 사실 보편적이지 않은가. 어째서일까? 답은 인간의 진화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에게는 비혈연 관계에서조차 임산부-신생아에게 온정적인 태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임신, 출산, 육아를 이미 경험한 중장년의 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과학적인 이유를 살펴보자. 물론 인간의 행동 양태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기에, 산모-아기를 향한 관심과 돌봄 제공 행동을 실험 연구나 이론으로 일일이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화인류학적 설명과, 출산이 초래하는 신경생리적 변화를 근간으로 어느 정도 해석을 시도해 볼 수는 있다.


출처 -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3>

먼저 인간 진화의 핵심 전략 중 하나인 공동 육아(Alloparenting) 현상이다. 다른 영장류에 비해 인간 신생아는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돌봄에 품이 아주 많이 든다. 인간의 집단생활이 힘을 발휘할 때다. 미국 인류학자 사라 블래퍼 허디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 달리 생물학적 부모를 넘어서 확장된 공동체가 함께 아이를 기르는 종이다. 공동 육아는 아기들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대가족, 이웃, 부족과 같은 주변인들이 적극 협력하는 것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산모-아기를 위한 공간적 확장이 이뤄진다. 실제로 작중에서는 장금자와 아일라뿐만 아니라 성기훈과 트랜스젠더 현주, 십 대 소년 스파이크까지 핏줄도 아닌 산모와 아기를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이로부터 태고부터 이어진 공동 육아의 원형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또 하나는 아기에 대한 민감성이 출산 후에도 지속된다는 점이다. 분만 및 수유를 관장하는 호르몬들은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말 그대로 뇌 구조를 바꿔놓는다. 옥시토신, 프로락틴 등의 신경 펩타이드가 활발히 작동하여 뇌의 신경가소성을 높이고 본능적 우선순위를 재편한다. 이렇게 촉진된 양육 반응 덕분에 양육자들은 새벽 수유 같은 초인적인(!) 일마저 해낼 수 있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이 변화가 상당히 장기적이라는 것이다. 중년에 접어들어도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 번 양육을 경험한 이상 동일한 신경생리 구조는 여전히 남아있다. 장금자와 아일라는 중장년의 여성들이니, 이들은 아기 키우는 일에서 손을 뗀 지 한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때 그 시절처럼 갓난아기에게 애정을 보낸다. 혈연관계라면 이 반응이 더 강렬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손주일 필요는 없다. 아기 우는 소리에는 절로 고개가 돌아가고, 아기가 위험에 빠지면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이로서 산모-아기를 위한 시간적 확장까지 갖춰진다.


꼭 과학적 해석을 곁들이지 않아도, 경험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된다. 얼마 전 들른 반찬 가게에서 여러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고 한 마디씩 하신다. "아이고, 세상에 임산부구나.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여름 만삭이 아주 말도 못 하게 덥고 힘들어. 먹는 거라도 잘 드슈." "그래도 지금이 제일 좋을 때지 뭐야. 호호호..." 첫 임신 때는 (서울깍쟁이답게) 낯선 이들의 지나친 참견이라고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둘째 임신이라 나도 넉살이 붙었다. "그러게요~ 제 배가 엄청 봉긋하죠? 이게 딸 배라서 이렇대요 글쎄." 세상 무뚝뚝한 나도 아이를 낳고 길러보니, 타인이 산모와 아기를 향해 보내는 열렬한 관심마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재생산 경험의 동질성이 낯선 이들마저 얼마나 단단히 엮어놓는지를.


혈연이 아니어도 호의는 공간적으로 확장되었다. 가임기를 지났어도 애정은 시간적으로 확장되었다. 이 촘촘한 돌봄의 관계망 속에서 인류가 무수히 많은 다음 세대를 품고 길러왔다. 장금자와 아일라의 희생적 선택의 근간에는, 이 끈끈한 연쇄작용을 표상하는 원형이 있다. 영화와 드라마를 감상하면서 아쉬운 부분이기는 했지만, 관점을 바꾸어 보니 시사하는 점도 충분하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서바이벌 게임과 좀비로 황폐화된 세계에서 희망을 상징할 만한 장치로서 갓난아기만큼 직관적인 대상이 또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작품에 대한 내 평가가 너무 야박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 안에 잠재된 원초적 가치를 환기하는 것, 그것도 좋은 이야기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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