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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의 Nov 08. 2022

"산모들, 태교와 안정 필요 없어요"

'유퀴즈' 서울대 산부인과 전종관 교수님 편에 대한 각주

작년 이맘때 즈음 우리나라에서 34년 만에 다섯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다태아 분만 권위자인 서울대병원 산부인과의 전종관 교수님이 각종 매체에 등장하시게 되었다. 특히 유퀴즈 인터뷰 중 가장 화제가 된 발언은 '태교와 안정이 임산부에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통념과 반대되는 것이기에 유명해졌고,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 수많은 반응이 올라왔다. 후후, 과학 커뮤니케이터이자 산부인과 의사로서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없지! 죽순이처럼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유퀴즈 방영분에 달린 수많은 댓글을 주욱 훑었다. 교수님의 발언이 전달이 잘 된 것인지,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남초(남성 유저 대부분) 여초(여성 유저 대부분) 골고루 6개의 커뮤니티를 돌며 적어도 댓글 500개는 읽었으니.. 이 발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여론은 수집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안정, 태교를 중시하는 태아 본위의 관습이 임산부에게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교수님 덕분에 이해하게 되었다.'라며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임신 중에 이왕이면 쉬는 것이 임산부에게도 좋은 것 아니냐?'라는 반응도 있었다. 여러 반응을 살펴보니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한 지점을 발견했기에, 방송된 내용에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여 각주를 달아보려고 한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TVN D ENT https://youtu.be/LcgNsmzYDMo




내가 임신 중반기에 들어섰을 때 일이다. 언제나처럼 병원에서 야간 진료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한 환자를 만났다. 그녀는 스스로 진단에 수술방법까지 결정해왔고 다짜고짜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나의 진찰 소견은 그녀의 자가 진단과 사뭇 달랐다. 환자가 원하는 바를 비유하자면, 귀가 아프니 귀를 떼어달라는 식이었다. 휴... 어째야 하나. 일단은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좋게 응대하려고 했다.


"아, 환자분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아마도 이 상태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고, 그래서 여러모로 알아보셨나 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제가 보기엔 이러이러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먼저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환자는 동의하지 못했다. 동의하지 않았을뿐더러 나의 의사면허와 전문의 자격의 진위를 의심했고 ("당신 의사 맞아? 나도 아는걸 니가 왜 몰라?") 무례한 언사로 의료의 질을 폄훼했다. ("진짜 아무 도움이 안 되네. 내가 겨우 이딴 얘기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아?") 그렇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수술을 해 줄 수는 없기에 나는 환자와 팽팽히 45분간 대치했다. 결국 그녀가 먼저 포기하고 진료실을 쌩하니 나갔다. 어휴... 별 별 사람이 다 있네. 반말에 고성을 장시간 듣다 보니 나도 기분이 상한 나머지, 다음 환자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한숨을 푹 쉬고 있었는데, 데스크 담당 간호사가 난처한 얼굴로 진료실에 들어왔다.


"원장님, 그게... 아까 그 환자, 진료비를 내지 않고 도망갔어요. 원하는 거 안 해줬다고..."


뭐? 도망갔다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제는 한숨이 아니라 콧김을 씩씩 뿜어댔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상스럽고 매너 없는 환자도 반갑지는 않지만, 45분간의 진찰과 상담에 대해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가는 것은 식당으로 따지면 무전취식, 즉 범죄의 영역이다. 물론 나는 월급쟁이 의사라서 환자가 미납한 만큼의 손해를 입지는 않는다. 진료비도 절대로 큰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대놓고 의료진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서, 진찰과 소견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그 당당한 선언이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진료실 한켠의 거울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열이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표정도 일그러져 있었다. 흥분해서 심박이 빨라진 나머지 쿵쿵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감정이 격해져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임신 중이잖아! 지나친 스트레스는 당연히 아기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


아가야 미안해. 놀랐지? 엄마가 이제 화 그만 낼게.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 급격한 혈류량의 증가와 부정적 감정, 스트레스 호르몬은 태아에게 좋을 것이 없다. 마음을 다스리고, 원래 하던 일을 하면 된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 정도로 몰염치한 환자는 매우 드물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고 상식적이다. 한 명의 특이 케이스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다.


아마 딱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너무나도 서러워졌다. 서글픈 마음은 점점 자라나서, 급기야 남편 앞에서는 엉엉 울었다. 나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로 아기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태교'를 내팽개친 나쁜 엄마가 되었다. 임신 중에 감정이 민감해진 탓이었겠지만, 우습게도 미친 여자처럼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임신하고 일 쉬는 여자도 얼마나 많은데~~
(팩트 : 내가 원해서 하는 일임. 팔자 괜찮음.)

그까짓 돈 벌겠다고, 이렇게 고생하고 욕을 들어먹어가면서...
(팩트 : 일이 힘드니까 월급을 받는 거다.)

남들 다~ 하는 태교도 못하고~~~
(팩트 : 태교는 과학적 근거가 없음.)
엉엉엉... "




태교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의 행간은, 태교를 챙기느라 무리하거나 남에게 태교를 강요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임산부가 이왕이면 정서적으로 편안한 것은 좋. 하지만 굳이 시간을 내서 프랑스식 십자수를 하거나 평소에 안 듣던 클래식 합주를 들을 사정이 되지 않는 엄마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과도한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상과 유리된 별도의 태교가 필요한 과학적 근거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던 삶을 살면 된다. 특히 직장을 다니는 것만으로, 태아에게 남들보다 부족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 자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나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자면, 무례한 환자로 인해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맞다. 이런 상황은 탄력적으로 회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태교라는 특별한 사회적 관습을 가정하는 것이, 나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되었다. '아이쿠, 스트레스를 받아버렸어! 태교에 실패했어! ' 태교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 전체의 부담과 손익을 고려했을 때에는, 차라리 태교 문화가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임산부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면 그것으로 하다. 다만 장기간 노출되는 스트레스, 극단적인 육체활동, 야간 근무 등은 무리가 된다. 이런 것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TVN D ENT https://youtu.be/LcgNsmzYDMo


<안정이 임산부에게 큰 의미가 없다>라는 말도 약간의 해설이 필요하다. 일상어에서의 '안정'은 어제와 오늘이 그냥저냥 비슷하고 과격함이 제거된 평화로운 상태를 뜻한다. (ex. 안정적인 소득.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는 심신의 안정이 산모에게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의학용어의 안정은 보통 '침상 안정(bed rest)'의 준말이다. 침대에 가만 누워있으라는 뜻이다. 교수님이 뜯어말리는 '안정'이란 물리적으로 지나치게 정적인 상태를 말한다. 안정이 필요 없다고 해서, 임산부가 불안과 격동에 시달리는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일부 산모들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면서 집에서 정말이지 꼼짝도 않고 누워있는 것이 유익하다고 착각한다. 실제로는 너무 적은 신체 활동은 임신 중에 쉽사리 피를 떡지게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적당한 활동이 낫다. 활동을 줄일수록 근육량이 떨어져서 건강도 해치고 삶의 질이 떨어진다. 주변에서 산모에게 안정을 강권하는 분위기 부담으로 작용해서 정상적인 활동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운과 산책은 건강 유지뿐만 아니라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고, 대부분의 산모들은 일상적인 수준의 신체활동을 지속해도 무방하다. 다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으니, 다시 나의 경험담을 들려드리겠다.




몇 년 전 스쿠버 다이빙에 한창 빠져있을 때, 마음먹고 다이빙 자격증을 따기 위해 교육 과정을 들은 적이 있다. 혼자 다이빙을 하러 온 내가 매일같이 젊은 다이빙 강사 부부와 다이빙 연습을 하고 수다를 떨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부부 다이버가 너무나도 멋져 보여서 어떻게 강사를 하게 되었느냐고 묻다 보니 알게 된 사연은 이렇다. 그 부부는 사내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한 사내 부부인 데다가, 다이빙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잘 다니던 회사를 동반 퇴사한 것도 모자라, 아예 다이빙 강사로 전직해서 외국 다이빙 리조트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쑥스러워서 직업을 잘 밝히지 않지만, 살아온 이야기를 이만큼이나 듣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내가 산부인과 의사라는 것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내 분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나에게 물었다!


"저, 사실은 저희가 이제 아기 계획이 있거든요. 임신하고 스쿠버 다이빙해도 될까요? 제가 산모도 운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다이빙도 해도 되지요? "


그녀의 간절하게 빛나는 눈빛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나는 약간 주저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해줬다.


"지금 강사님에게는 이게 직업인지라 제가 뭐라 말하기 조금 조심스럽긴 한데, 보통 임신 중에 스쿠버 다이빙은 권하지 않아요..."


취미를 좇아 직업도 바꾸고 사는 곳도 바꿀 만큼 열정적인 사람이 임신 중에 다이빙을 쉬어야 한다면 얼마나 속상할까? 나도 덩달아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이빙은 태아 감압병의 가능성으로 임신 중에 권하지 않는다. [1] 물론 프로 운동선수 같은 경우에는 전문의 상담 하에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 있겠으나, 건강한 사람도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즐기는 레포츠라면 임신 중에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다만 다이버 부부와 이 대화를 나누고 나서 '임산부 운동해도 됩니다'라는 명제가 때로는 지나치게 넓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신 중에 모든 종류의 운동을 권장하지는 않으며, 운동의 강도도 개인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조정해야 할 수 있다. 임신 중에 복부에 물리적 충격을 줄 수 있는 운동(복싱, 격투기 안됩니다...), 잠수, 고산지대 등반처럼 같이 감압이나 저산소증의 위험이 있는 운동(참고로 수영은 임신 중에 좋은 운동이다), 산악자전거나 승마처럼 낙상, 부상의 위험이 큰 스포츠는 권하기 어렵다. 이런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임산부가 운동을 하는 것은 대체로 유익하므로, 개인의 건강 상태와 임신 전에 하던 운동량 수준을 고려해서 정하도록 하자.




아낙네가 아기 가지면 결코 거꾸로 자지 않으며, 모퉁이로 앉지 않으며, 빗딛지 않으며, 벤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않으며,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며, 눈에 사기로운 빛을 보지 않으며, 귀에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입에 그른 말을 내지 않으며, 밤이면 소경을 시켜 시를 외워 듣고, 바른 일을 말하였다.

출처 : 조선왕실의 출산문화


저런 엄격한 태교 기준을 지키는 것은 왕실이나 양반 여성들이나 가능했을 것이다. 나의 추측으로 태교와 안정에 대한 강조는 격렬한 노동이 일상이었던 전근대 시대에 산모를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기준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했을 것 같다. 오늘날의 달라진 시대상을 고려하면 바람직한 산전관리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임산부에게 꽉 짜인 삶의 양태를 강요하거나, 지나친 제한을 부여하는 것은 근거가 없을뿐더러 유익하지도 않다. 임신 중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내 생각에 3가지면 충분하다. 엽산/철분 등을 포함한 충분한 영양 섭취, 주기적 산부인과 검진, 마지막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Committee on Obstetric Practice (2002). ACOG committee opinion. Exercise during pregnancy and the postpartum period. Number 267, January 2002. American College of Obstetricians and Gynecologists. International journal of gynaecology and obstetrics: the official organ of 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Gynaecology and Obstetrics, 77(1), 7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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