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 청년 세대 생존의 기술
본 글은 과학책방 갈다에서 발간한 과학서평잡지 SEASON 2022 여름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청년 세대의 삶이 위태롭다. 진학과 취업의 문은 좁아질 대로 좁아져 있고, 주거와 생활에 드는 비용이 치솟아 일상은 팍팍하다. 이런 세태가 숫자로 드러나는 것이 대한민국의 출산율이다. 2021년 기준으로 한 명의 여성이 평생에 걸쳐 겨우 0.81명을 낳는 수준이다. 현재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출산율의 절반에도 크게 못 미친다. 이러한 초저출산 현상은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사회문제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개개인에게 임신과 출산, 양육이 이전 세대보다 훨씬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혼외 출산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 풍토에서 미혼 커플이 임신을 계획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기혼 부부들도 커리어와 재정 상황 등 다양한 현실적인 이유로 임신 시기를 조절한다. 가족계획을 세우려면 취업, 결혼, 주거 문제가 우선 해결되어야 하는데 첫 단추부터 꿰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원치 않는 임신을 덜컥 하게 된다면 인생이 갑작스레 거대한 암초에 부딪친 느낌일 것이다. 당장 내 직장은? 학업은? 출산 후에도 지금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기 봐줄 사람이 없는데 어쩌지? 애들 교육에 돈이 엄청나게 들어간다는데, 지금 우리 월급으로 감당이 될까? 현실적인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그러니 당신과 파트너 사이에 자녀를 가질 계획이 없다면, 애초에 성관계를 하지 않거나 피임을 할 수밖에 없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상이 팍팍할수록, 여유가 없을수록 피임에 대한 '각오'가 달라졌다. 돈 문제, 학업 상황이나 직장 환경 때문에 작은 가능성일지라도 도저히 임신을 감당할 수 없는 시기에는 콘돔을 쓰면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 경구피임약을 동시에 복용했다. 다른 청년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한 피임이야말로 현대 정글에서 인생 계획을 지키는 생존 기술이다.
이러한 인식은 피임에 대한 통계 자료[1]에도 드러난다. 실제로 한국의 피임실행율은 이전보다 높아지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피임을 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011년 19.7%였으나, 2018년에는 7.3%로 크게 감소했다. 피임을 위해 콘돔을 착용한다는 응답도 과거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상승해 74%에 이르고,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인공임신중절술도 줄어드는 추세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피임 교육이 활성화된 것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피임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피임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본인의 상황에 잘 맞는 피임법을 현명하게 선택한 걸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고 있다는 피임법은 '월경 주기법'이다. 여성의 생리 주기를 관찰해서 난자가 배란될 법한 시기에는 성관계를 피하는 방법이다. 몸에 특별한 작용을 가하지 않아도 되기에 부작용에 대한 부담감이 적지만, 대신 임신 확률은 꽤 높은 편이다. 실제로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월경 주기법의 실패 사례를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나름대로 배란일을 피해서 성관계를 했지만, 뜻하지 않게 임신하게 되어서 병원을 찾는 경우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질외사정법'도 선호도는 높지만 의학적으로 권하지 않는다. 이는 성관계 도중 타이밍을 맞춰 여성 체외에 사정하는 방법이며, 조절하기 쉽지 않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위의 두 가지 방법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좋은 피임법이라고 할 수 없다.
혹자는 주장한다. 질외사정법이나 월경 주기법도 성공률이 70~80%에 이르기 때문에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원치 않는 임신을 할 가능성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사자 무리의 사냥은 매번 성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할 때가 더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자 떼를 마주친 톰슨가젤이 느긋하게 여유부리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언제나 전력을 다해 도망간다. 목숨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산부인과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피임도 그와 다르지 않다. 당신이 피임에 대해서 진지하다면, 결코 질외사정법이나 월경 주기법에 안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보다 확실한 피임법이 있다. 대중적이면서 간편하고, 무엇보다도 성병을 예방할 수 있는 콘돔이 첫손에 꼽힌다. 그리고 여성 호르몬을 조절하여 매우 높은 피임 성공률을 보장하는 경구피임약 복용과 자궁 내 호르몬 장치, 난관이나 정관을 묶는 수술법도 훌륭한 피임법이다. 각 방법의 사용법, 부작용과 사용 대상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추천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난관이나 정관을 묶어버리면 피임 성공률이야 100%에 가깝지만, 향후 임신 계획이 있다면 이런 반영구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다. 자궁 내 장치나 경구피임약도 의학적 상황에 따라서는 쓸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성공률은 피임법 선택의 절대적인 지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편의성, 피임 기간, 유지 비용, 기저 질환을 고려하여 산부인과 의사와 전문적 상담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안전한 방법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본인에게 더 잘 맞고 부작용이 적은 것을 골라야 할 텐데, 산부인과 의사로서 안타까운 대목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권에서 경구피임약을 택하는 비율은 30%에 육박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유난히 그 비율이 낮다는 점이다. 과거에 비해 상당히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18%에 불과하다. 피임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조금이라도 더 확실한 방법을 고르고 싶지 않을까? 제대로 복용만 하면 99% 이상의 피임 성공을 보장하는 경구피임약을 어째서 기피하는 것일까.
먹는 피임약은 1960년 미국에서 최초로 출시되었다. 이 작은 알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을 거론할 때마다 늘 상위에 오른다. 피임약이 모든 약 중 최고로 좋은 약이라서가 아니다. 통상적으로 '좋은 약'이란 모름지기 수많은 사람을 살려내거나, 치명적인 질환에 대한 특효약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피임약은 다르다. 가족계획이라는 분명한 필요에 의해서 만든 발명품이다. 그 누구도 살려내지 않았고, 그 어떤 병도 고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의 약 반열에 오른 경구피임약은 전 세계적으로 사회와 문화를 바꿔놓았다.
경구피임약의 등장 이후로 임신과 성생활이 분리되기 시작했고 자녀를 낳는 것은 무작위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여성들은 원하는 만큼 출산 시기를 조절해서 교육 기회를 확보하고 전문 직종에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베이비붐으로 인한 인구 폭증으로 불거진 사회 문제가 조절 가능한 범위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경구피임약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일까? 여성의 몸에서는 월경 주기와 생식에 관여하는 두 가지 여성호르몬이 분비된다.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다. 이들 호르몬의 분비량이 주기적으로 많아지거나 적어지는 작용에 따라 여성의 난소와 자궁은 난자를 배출하는 배란과 생리를 반복한다. 하지만 일단 임신을 하면, 이들 호르몬의 규칙적인 줄넘기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는다. 임신이라는 특수 상황을 위해 여성호르몬이 높은 농도로 유지되며, 생리와 배란은 일시적으로 중지된다.
여성호르몬 성분으로 제조된 경구피임약을 복용하여 '임신한 상태'를 흉내 내면 신체는 배란을 멈춘다. 성관계 시에도 정자가 만날 난자가 없으니, 수정과 임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약 성분의 농도가 일정해야 계속해서 임신한 척 몸을 속일 수 있기 때문에 경구피임약은 매일 같은 시간에 복용해야 최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경구피임약을 기피하는 이유를 환자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다양하다. 가장 먼저 부작용을 걱정한다. 특히 혈전증은 경구피임약의 드문 부작용 중 하나로, 경우에 따라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이 외에도 메스꺼움, 소화불량 등을 호소하기도 한다. 약 개발 초기에는 부작용이 두드러졌지만, 개량을 거듭하여 현재는 대부분의 부작용이 경미한 수준이다. 혈전증은 흡연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건강한 젊은 여성에게 나타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35세 이상의 흡연 여성이라면 자궁 내 삽입 장치, 콘돔 등 다른 방법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런 설명을 통해 약물 부작용에 대한 걱정을 덜어주지만, 꼭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경구피임약 복용을 꺼리는 환자가 여전히 많다.
사실 경구피임약은 피임 목적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산부인과 진료실에서는 오히려 월경 주기나 월경 증상의 조절을 위해서 더 많이 처방된다. 피임 목적이 아니더라도, 다른 의학적 이유로 매우 흔히 쓰이는 약이다. 그런데도 의사로서 진료실에서 이런 일을 겪기도 한다. 심한 월경불순을 겪고 있는 여고생 환자에게 경구호르몬 제제를 권하자마자 보호자로 동행한 어머니가 나에게 쏘아붙였다.
"여보세요, 지금 우리 애한테 피임약 먹으라고요?
우리 애는요, 처녀라고요!"
성경험의 유무와 상관없이, 치료를 위해 호르몬 성분이 필요한 경우라고 설명을 마저 이어나가려 했지만, 보호자는 내 처방이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씩씩대며 진료실을 나가버렸다.
경구피임약이라는 명칭 때문일까? 피임은 이 약이 가진 여러 가지 효과 중 하나일 뿐이지, 본질은 여성호르몬 복합 제제이다. 그래서 생리 증상의 치료에도 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들과 대면하다 보면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과 성적 문란함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심심치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런 인식은 사실도 아니거니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경구피임약의 성분표에는 여성호르몬 성분과 용량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 어디에도 문란함이나 수치심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일개 도구에 불과한 작은 알약에 낡은 사회적 함의를 덕지덕지 붙여둘 필요가 없다. 효과와 부작용을 잘 살펴서, 필요한 경우에 알맞게 사용하면 될 따름이다.
여자 몸의 자연스러운 섭리를 방해한다는 혐의에도 억울한 면이 있다. 애초에 임신을 안 하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생물학적인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멀지 않은가. 여성의 생식기관을 지나치게 신비스럽게 여기다 보니 월경에 영향을 미치는 어려운 이름의 호르몬을 먹는 것이 거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월경 또한 다른 모든 신체 현상처럼 주술이나 미신이 아닌 생리학과 의학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조절하려는 노력이 그것에 대한 존중을 방해한 적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약국으로 달려가 피임약을 사 먹으라는 것이 결론일까? 아니다. 피임도 연애를 시작할 때나 결혼을 약속할 때, 출산을 계획할 때와 마찬가지로 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상호 간의 이해를 토대로 평등한 대화가 오가야 한다. 우리에게 피임이 필요할까? 필요하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효과와 부작용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성생활을 한다면 이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을 절대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피임에 대한 합의는 성관계에 대한 합의만큼이나 중요하다. 또한 앞서 강조했듯이 각각의 피임법이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본인들에게 알맞고 되도록 성공률이 높은 방법을 합리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오늘 당신이 선택한 피임법은 무엇인가? 어떤 대화를 통해서 그 결정에 이르렀는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였는가? 그 피임법을 올바른 방법으로 적용하고 있는가? 나는 성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위의 질문들에 문제없이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피임에 대한 담론이 보다 풍성해지기를, 우리 세대의 ‘생존법’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참고 문헌>
[1]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201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8578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