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한국인을 위한 진화론
과학 세계에는 네 가지 유명한 악마가 있다. 물론 종교적 의미의 악마가 아니고, 과학자들이 가정한 상상의 존재들이다. 데카르트의 악마, 맥스웰의 악마, 라플라스의 악마는 각각 감각 지각과 인식, 열역학 법칙, 기계적 결정론에 대한 사고실험을 통해 등장했으며, 초월적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네 번째 악마는 다윈의 악마이다. 태어나자마자 번식을 시작하고, 일생에 걸쳐 생식을 지속한다. 수명은 무한하며, 영원히 번영할 수 있다. 자연선택으로 빚어진 무시무시하리만큼 완벽한 존재, 다윈의 악마이다. 우리 주변에서 비슷한 것을 굳이 찾아보자면 엄청난 번식력과 끈질긴 생존력을 자랑하는 바퀴벌레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퀴벌레의 번식력은 엄청나지만 수명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고 천적도 많다. 무섭기는 하지만 진짜 다윈의 악마가 아니다. 다른 종족도 생각해보자. 대왕고래는 수명과 덩치가 경이로울 정도이지만 한 번에 새끼를 하나밖에 못 낳으니 번식력이 부족하다. 인상적인 생장력을 자랑하는 개구리밥도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다윈의 악마 칭호를 가져가기에 이 자그마한 수생식물은 너무 무력하다. 어째서 진화적으로 완전한 승전보를 울린 다윈의 악마는 현실에 없을까?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와 충돌하는 라플라스의 악마와는 달리, 다윈 악마는 물리 법칙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생물종들이 이미 진화의 긴 시간을 지나온 만큼, 보다 ‘완벽’하게 다듬어질 수는 없었던 것일까?
과학자들은 현실에 다윈 악마가 없다는 것을 선택과 타협의 문제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생애 초기부터 왕성하게 번식에만 몰두하는 종족은 수명에는 손해를 입을 수 있다. (게임에서도 극초반 러쉬는 어디까지나 초반 올인 전략이다.) 인간처럼 어린 시절 성장에 집중하는 종족은 일찍부터 생식을 시작할 수는 없다. 어차피 현실에서 생명체가 획득할 수 있는 자원에는 한계가 있고, 이 자원을 성장, 유지, 번식에 적당히 할당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최고점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자연선택이 생물체의 형질을 잘 다듬는 것은 맞다. 바퀴벌레는 수많은 알을 낳으며 환경 저항력이 높고, 대왕고래는 인간 빼고는 천적이 없을 만큼 강력하고, 개구리밥은 순식간에 호수를 뒤덮을 만큼 빠르게 자란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으며, 그래서 ‘다윈의 악마’가 아니다.
온갖 악마를 상상해낸 기발한 과학자들도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 자연 환경의 한계와 무시무시한 천적을 문명의 힘으로 극복해낸 호모 사피엔스가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생명력을 거둬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초저출산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 바로 우리들은 다윈의 대천사이다. 아이를 거의 낳지 않고, 만약 낳아도 최대한 미룬다. 한국인이 평균적으로 꽤 오래 살기는 하지만, 대신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압도적 1등이다. 생을 연장하고 번식을 꾀하는 생명의 본성을 단체로 배반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한국인이야말로 여러모로 ‘다윈의 악마’와 반대이니 다윈의 천사로 불리우는 것이 마땅하다.
다윈의 천사는 것은 사실 자조적인 농담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다윈의 악마가 없다는 사실로 다시 돌아가보자. 각각의 생명종은 완벽하지 않고, 사실 완벽할 필요가 전혀 없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제 나름의 ‘적소’를 찾아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각 종족의 생애사 전략이 단일하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 종족 안에서도 내가 꼭 최강자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은 잘못 사용된 용어라는 문제 제기가 있다. fittest는 엄연히 최상급이다. ‘가장 잘 적응한’ 1등 개체가 생존한다는 뜻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냉혹한 야생에서도 아주 운이 없거나 현격히 부족한 개체만 탈락하는 것이지, 최강자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하다못해 야생의 위험과 변수를 상당 부분 극복한 인간의 문명 사회는 기준이 더 널널하다. 꽤 부족한 개체도 그럭저럭 살아 남아 번식할 수 있다. 때로는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형질도 운만 좋다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생명체는 이런 잉여와 불합리를 품고도 그냥저냥 살아간다.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자연선택을 ’survival of the fitter’로 표현하자고 제안한다. 최상급(fittest)가 아닌 비교급(fitter)를 쓰자는 주장이다. 조금만 더 잘 적응해도 충분한데, 1등이 되어야 살아남는다는 듯한 표현이 자연선택의 본질을 호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윈의 천사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의 세계관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 개체가 살아남는다고, 혹은 번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까? 최근 들어 매일같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불태우는 주제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생존과 번식은 범상한 이들에게도 허락되는가, 최적자(the fittest)의 전유물인가? 슬프게도 어느 새부터인가 실수령 급여 얼마, 수도권 몇 평 아파트, 키와 외모에 대한 말도 안되는 높은 기준을 정해놓고 최강자가 아니라면 멸시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눈치를 보느라 상대적 박탈감은 극심하고, 결혼과 출산은 감히 꿈꾸기 어렵다. 이 문화는 진화론보다 훨씬 비열하고 가혹하다. 우리는 ‘자연선택’이나 ‘다윈주의’라는 말에서 무심코 무한경쟁과 냉정한 탈락을 연상하지만, 다윈의 세계관이 끊임없이 패배자를 찍어내고 조롱하는 한국 사회보다 훨씬 너그럽다. 과학 이론에 도덕 감정을 대입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지만, 나의 솔직한 느낌이 그렇다.
다윈의 천사들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천국이 아니다. 우리는 이 곳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며 지옥이라고 여긴다. 1등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다윈의 지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참고 문헌>
최재천. (2009). 다윈 지능. 사이언스북스.
다니엘 S. 밀로. (2021). 굿 이너프. 다산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