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책 써서 욕 먹는 중입니다.
이 책은 출산율을 떨어뜨릴까?
아주 평범한 동네 산부인과 의사인 내가 쓴 글이 기어코 책이 되고, 나도 출간 작가(!)가 된다는 설레임은 잠시뿐이었다. 제목에 '출산'이 들어가서 가장 핫한 소재인 출산율을 연상시키기 때문인지, 혹은 '배신'이 들어가서 마치 도발적인 문제작처럼 보여서인지... 신문사에 신간 서평이 나고 조금씩 반응이 달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신기한 초보 글쓴이는 자연스레 댓글에도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의견은 내 책 때문에 출산율이 더욱 떨어질 것이라는 일갈이었다. ("이딴 책 내서 나라 망하게 만들 일 있냐?")
설명이 필요한 농담은 실패한 농담이라던데. 그런 의미에서 내 책은 큰 실패인 것 같다. 하지만 고작 책 하나로 대한민국을 망국으로 이끈 을사오적, 합계출산율 0.7 시대에 출산을 욕보인 파렴치한 매국노, 출산 산업 종사자이면서도 출산을 폄훼하는 배신자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부득불 변명을 해야 한다. 글쓴이는 의사이고 생체와 과학을 다루는 것에는 비교적 익숙하지만 다른 분야엔 문외한이다. 나는 인구학자도 아니고 경제이론을 모르며 정치인이나 운동가는 더더욱 아니다. 출산율을 둘러싼 구조적 이슈와 사회경제적 상황에 말을 얹을 이유도, 자격도 없다. 게다가 산부인과 의사는 임산부를 돌보는 사람이다. 굳이 실질적 이득을 따지자면, 아이를 낳는 사람이 많아져야 일거리가 늘어난다.
《출산의 배신》은 임신-출산-육아로 이어지는 재생산 경험이 주제이다. 출산율과는 솔직히 직접적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출산율은 대체로 '아이를 낳을 결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이 결심은 산부인과 의사가 조언할 영역이 아니다. 출산율은 경제적, 사회문화적 여건이 주로 관련있어 보인다. 실제로 지난 포스팅 국토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주택 가격, 사교육비, 가구 소득과 경력 단절 등이 출산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 이외에도 전년도 출산율, 문화적 분위기, 종교와 개인의 가치관 등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복잡한 방정식의 셈법을 거쳐 출산을 '결심'해서 아기를 낳으면? 신생아 숫자가 하나 더해진다. 한 명의 인간이 한 개의 숫자로 환원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출산율은 그 과정을 경험하는 인간의 희열과 고통, 모순과 극복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내가 관심 있는 것은 경험이다. 나는 진료실에서 임산부의 이야기를 듣는다. 너무 당황스럽다는, 뭔가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듣는다. 저절로 의문이 생겼다. 요즘 사람들은 똑똑해서 보통 계획 임신을 한다. 자신들의 거주 형태, 향후 소득, 직업 안정성, 복직 가능성, 육아 도움 인프라를 미리 계산해서 아기를 가진다. 그렇게 준비된 '결심'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아기 낳고 키우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더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관찰하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아기를 낳아보니 재생산 특유의 성질이 보다 생생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현대의 임신-출산-육아가 갖는 보편적 속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자가 아파트가 있어도, 복직이 보장되는 공무원이어도, 개인의 성품이나 가치관이 달라도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공통점에 촛점을 맞추었다.
출산율에 대한 분석을 기대했다면 《출산의 배신》은 크게 실망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1부의 상당 부분은 인간의 출산이 왜 다른 동물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고인류학과 진화생물학을 동원해 해설하는 것에 할애되어있다. 산통과 그 기원은 의사인 내가 보기에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인이 아기를 안 낳는 이유로 '아플까봐'는 순위에 꼽히지 못한다. 누구나 알다시피 경제와 사회적 요인이 훨씬 크다. 나는 한국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거나 고용 형태를 대대적으로 손보는 정책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게다가 그런 방법이 있다 한들 커다란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재생산 경험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은(일단 돈도 훨씬 덜 들고) 오히려 임신-출산-육아를 더 매끄럽게 해내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혀가 길면 멋이 없는데, 쓸데없이 변이 길어졌다. (가장 먼저 출간 소식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해명이 먼저라니...) 이 책은 출산과 양육에 기쁨과 행복이 없다는 폄하나 가치판단이 아니다. 출산율을 분석하거나 비출산을 부추기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산부인과 의사이자 아기 엄마로서 인간이 아기를 배고, 낳고, 키우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경험인지 제대로 알아보려는 개인적 노력의 일환이다. 이미 책을 '출산한' 사람으로서, 뜻이 온전히 전달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