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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09. 2020

아웃사이더

길이라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있단 말이오. 

2007년 처음 선 보인 애플의 아이폰은 그야말로 일대 혁신이었다. 2009년 한국에도 아이폰이 처음 출시되었고, 2010년 삼성에서도 갤럭시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갤럭시 출시 이후 스마트폰 시장은 아이폰과 갤럭시의 양강 체제로 굳어지게 되었다. 스마트폰 유저 중 아이폰과 갤럭시 두 가지 모델을 단 한 번도 안써본 유저를 찾으려면 정말 극소수일텐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2011년 처음 펜텍의 시리우스 모델을 산 이후로 4,5차례 핸드폰을 바꿨지만 고집스럽게 LG 등 다른 브랜드를 고집해왔다.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삼성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늘 나는 아웃사이더였고, 비주류였다. ‘니가 서울대라도 가게?’라는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수능 사회탐구에서 국사를 선택했었고, 남들이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동안 지금까지도 소녀시대 9명의 얼굴을 구분 못 할 만큼 무관심했다. 오죽했으면 런닝맨에 전소민이 처음 합류했을 때 프로듀서 101의 전소미가 예능에도 진출했나보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대학 때는 경영학과인 주제에 관광학부, 사학과,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수업을 듣는다고 타단과대를 기웃거리느라 전공 이수학점이 부족해서 4학년 막 학기에도 전공 수업을 3,4개씩 들어야 했었다.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의 미디어 글쓰기 수업 시간에 있었던 토론이었다. 조별로 돌아가면서 사회 이슈에 대한 발표를 진행하는 과제였는데 우리 조의 주제는 ‘대학등록금 반값’이었다. 주제 특성상 찬반 토론 형태로 발표를 준비하기로 했지만 아무도 대학등록금 반값을 반대하지 않아 토론이 성립되지 않을 뻔한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내가 반대 쪽 입장을 맡아 준비하기로 했다.     

     

   발표 당일 30명 정원의 수업에서 우리 조의 사회자 1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대학등록금 반값을 찬성하는 가운데 나는 28:1의 격렬한 토론을 이어가며 십자포화를 맞아야만 했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하다가 깨져나가던 내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토론뿐만이 아니라 게임을 할 때도 숫자가 적어서 질 것 같은 팀에 일부러 붙다보니 통산 승률이 매우 낮은 편이고, 고스톱을 칠 때도 낮은 확률에 무리수를 두다가 고박을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나조차도 가끔씩 망설여지지만 이미 일종의 신념으로 굳어진 터라 늘 비주류를 추종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막연히 혼자였던 시간이 길다보니 비주류가 된 건가 싶었었다.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 “왜 그런 고생을 사서해?”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삼국지 관련 유튜브를 보다가 어렴풋이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삼국지 관련 게임을 할 때도 나는 단 한 번도 ‘조조’를 선택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늘 유비를 가장 좋아했고, 그 다음은 여포, 마등, 손견, 손책 등의 비주류 군주였지 조조로 플레이해본 적은 없었다.     

     

   삼국지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조조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쉽게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이다.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영토가 부족하긴 하지만 쓸 만한 A급 장수가 10여 명이나 있고, 특별한 노력 없이도 실제 역사처럼 A급 장수가 계속 추가된다. 후기 시나리오로 갈수록 영토도 훨씬 넓어져서 삼국통일이라는 미션을 깨기 가장 쉬운 조건이다.     


     

   반면 유비의 경우 대부분의 시나리오에서 영토는 1/50이고 S급 장수인 관우, 장비를 제외하면 쓸 만한 장수는 몇 없다. 후기 시나리오에서나 1/6의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이미 그때 조조는 1/2의 영토를 가지고 있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실제 역사처럼 매우 불리한 조건이지만 난 늘 유비를 선택했고, 조조를 격파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나관중의 ‘유비 = 착한 놈’, ‘조조 = 나쁜 놈’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는 착한 주인공이고, 조조는 악당이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악당을 물리쳐야지.’라는 마인드랄까.     

     

   문제는 삼국지 게임만으로 그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조차 ‘세력이 약하면 착한 사람, 세력이 강하면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짙어진 것이다. 내가 어린 마음에 영어 공부하기 싫어서였지만 미국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졌던 이유고, 삼성을 비롯한 재벌가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좋게 말하면 소위 말하는 ‘갑질’을 용납하지 않고, 약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강자에 대한 맹목적인 선입견이 생겼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약자 = 유비 = 착한 사람’, ‘강자 = 조조 = 나쁜 사람’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다보니 ‘약한 전력’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옹호를 하게 되고, ‘강한 전력’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게 되었다. 약한 전력(유비)를 옹호하는 일은 좋은 일이고, 착한 일이니까 당연한 일이고 강한 전력(조조)를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니까 역시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마치 유비를 응원하고, 조조를 까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단순히 강자의 갑질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으로 끝나면 되는데 어느 순간 모두가 Yes를 외칠 때 No를 외치는 것조차도 ‘난 역시 소수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야. 올바른 행동이야.’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다못해 내 신념으로 삼아버렸다. 대학등록금 반값에 대해 찬반 토론을 벌였을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상대의 논리, 내 논리가 옳고 그름을 떠나 ‘내가 소수 의견의 편이니까 무조건 옳아’라고 믿었고, 마치 장판파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막던 장비처럼 격렬하게 토론에 임할 수 있었다.      


늘 유비를 좋아했고, 유비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시대의 흐름이 조조에게 넘어갔을 때 조조에게 반대하다가 반평생을 쫓겨 다니던 유비처럼 나 역시 대세의 흐름을 거역하다보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모난 돌 신세였다. 특히나 진로를 결정할 때도 청개구리처럼 대세를 따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 때는 부모님이 명문대를 가야한다고 강요하고 남들이 명문대를 가겠다고 할 때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격렬하게 반항을 했고, 재수를 해야만 했다. 경영학과에 진학한 후에는 모두가 한 번쯤은 고민해보는 CPA 시험을 회계, 재무는 재미없고 못한다는 이유로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취업을 하던 시절에도 1도 관심없는 핸드폰, 자동차 회사 들어가서 뭐할 거냐며 남들은 못 가서 안달인 대기업에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님과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지만 내 생각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길이라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있단 말이오. 한 사람이 다니고 두 사람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다니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법"이라는 드라마 명대사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에서는 지금 내가 도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꿈이라고 말하겠지만 언젠가 보란듯이 내 길을 개척하겠노라고 그렇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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