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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0. 2020

할 줄 아는 게 글쓰기 밖에 없어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

   2am은 줄 수 있는 게 이 노래밖에 없다고 했지만, 난 그게 참 부러웠다. 자타공인 음치, 박치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초등학생 때 사물놀이 시험을 보다가 나 때문에 같은 조 친구들이 자꾸 헷갈린다고 최하점을 받고 쫓겨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 사람, 음악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음악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내 의지로 움직이는 다리이건만 축구공 한 번 제대로 차지 못하는 ‘국민 개발’이였고, 내 의지로 움직이는 팔이건만 내가 손대기만 하면 족족 망가지는 ‘마이너스의 손’을 가졌다. 이른바 ‘몸치’다. 로봇, 미니카 같은 조립은 당연히 못했고, 전자기기는 종류를 막론하고 고장 났으며 심지어 그림 그리는 것조차도 유치원생 수준을 벗어나질 못했다.


  단소를 배우든, 태권도를 배우든, 수영을 배우든, 고무동력기를 조립하든, 컴퓨터를 배우든 하나같이 평균 이하의 성적표를 들고 오는 탓에 부모님께서는 한숨만 쉬셨다. 특히나 미술은 심각했다. 유치원에서 그린 그림으로 상 한 번 받고 신나서 화가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예고 입시를 준비하는 전문 화실을 5년 가까이 다녔지만 나에게는 미적 재능이 없다는 사실만 되새겨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재능이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화실을 그만둔 뒤에도 중학교 수행평가 때문에 미술학원을 좀 더 다니긴 했으나 단 한 번도 최하점을 넘기지 못했으니 색맹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모님께서는 학원을 보내면 천재니 영재 소리는 못 들어도 남들만큼은 하겠거니 생각하셨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어디 하나 모자라진 않나 의심할 만큼 처참한 결과를 보고 과감하게 ‘아 이 아이는 공부라도 잘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공부는 그나마 남들만큼은 했다. 읽고 쓰는 건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못 하는 게 많으니 시간도 많았다. 반 대항으로 축구 시합을 해도 내가 필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노래를 못하니 노래방에 가자고 꼬시는 친구도 없었고, 미적 재능이 없는 만큼 패션에도 관심이 없어서 쇼핑하러 가자는 친구도 없었다. 넘치는 시간 동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책을 읽는 거였고, 글을 쓰는 거였다.


   친구들 사이에서야 예체능 잘하는 친구들이 인기가 많았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 같은 어른들 사이에서는 늘 책을 붙잡고 사는 내가 예쁨을 받았고, 어른들은 악필일지언정 뭐라도 글 쓰는 것을 보면 대견해했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은 음치, 몸치, 박치의 삼치에 손재주와 미적 감각마저 없는 내가 유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칭찬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꽤나 많은 책을 읽은 것에 비해 필력이 보잘 것 없어서 그 흔한 교내 백일장에서조차 상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 글쓰기는 여전히 좋아했지만, 더 이상 작가가 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작가를 꿈꾸던 친구들이 과감하게 국문과를 진학하거나 대학교를 자퇴하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동안 경영학과에 진학해서 취업을 해보겠다고 어쭙잖은 코스프레를 했던 이유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는 것이 티가 나서 그런지 취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명색이 작가를 꿈꾼다고 말했는데 자기소개서가 줄줄이 광탈하면서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그 때 다니던 학원에서 진행하던 ‘백 개의 글로 단단해지다.’는 글쓰기 스터디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소개서 연습이라도 하는 셈 치고 시작했는데 자기소개서는 정작 몇 편 쓰지도 않고 그냥 마구잡이로 써내려갔다. 그야말로 케케묵은 감정을 토해내듯이 쓰다 보니 반 년 만에 100편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자기소개서는 아니지만 꾸준히 쓴 덕분인지 140번째 글을 썼을 때 취업에 성공했지만 8개월 만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퇴사를 하면서 재취업을 준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다. 8개월의 회사 생활이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던 데다가 1년이 채 안 되는 애매한 근무 기간과 30이 넘은 나이 때문에 재취업이 된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내가 재취업을 하지 않고 먹고 살 방법이 마땅치가 않다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글을 쓰기로 했다. 백글단에서 글을 쓰던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다. 부족하지만 내 글을 보고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 피드백이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문열 같은 대단한 필력을 가진 건 없지만 3년 가까이 글을 쓰면서 ‘소재를 찾아내는 능력’과 ‘분량을 채워나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작가가 되진 못해도 글쓰기 초보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강사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강사가 되기 위해 글쓰기 책을 사서 봤고, 강원국 작가님 등으로부터 수업을 듣기도 했다.


   작가의 꿈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2019년 초, 이그나이트 청춘과 골든마이크 시즌 8이라는 스피치 무대를 준비하면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그 해 여름부터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서 드라마 작가 과정 수업을 들으면서 준비 중이다.   


   여전히 내 미래는 불투명하다. 글쓰기 강사도, 드라마 작가도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커리큘럼을 만들거나 대본을 쓰다 막힐 때면 ‘내가 잘 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유일하게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썼고, 내일도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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