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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09. 2020

마이웨이(feat.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취업 준비 혹은 졸업 후의 미래를 위해 2,3과목 정도 듣는 게 보통인 4학년 마지막 학기에 12학점을 채워 들었다. 복학 이후 바뀐 규정 때문에 들어야하는 기초필수 과목도 있었지만 3학점짜리 ‘삼국지와 인간’이라는 교양에 꽂혔기 때문이다. 이미 교양과목은 차고 넘치게 들었기에 들을 필요가 없었지만 ‘삼국지’라는 이유만으로 냉큼 수강신청을 해버렸다.


  그 당시 기말고사 대체 과제였던 개인 과제는 삼국지를 주제로 한 수업시간에 다루지 않은 사건 혹은 인물에 대한 레포트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초중고 때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관우를 적어냈을 만큼 관우를 사랑했기 때문에 관우의 최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번성 공방전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적어냈다.


  관우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유 중 하나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의 능력치도 능력치지만 유비에 대한 변하지 않은 충성심이 가장 컸다. 관우는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유비가 아무 것도 없던 시절부터 의형제를 맺고 유비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했다. 유비가 조조에게 서주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도 조조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고, 유비의 소식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조조를 떠난다.


  번성 공방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매복에 걸려 손권에게 포로가 된 후에도 손권의 회유에도 기꺼이 자신의 목을 내밀며 유비와의 의리를 지켰다. 어쩌면 맨 처음 사촌형 집에서 봤떤 삼국지의 장면이라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삼국지를 통틀어 관우가 죽었을 때 가장 많이 울었고, 지금도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관우가 불쌍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멋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존경하는 인물로 관우를 꼽을 수밖에 없었다. 관우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 동안 읽은 수백, 수천 권의 무협 소설 속에서 많은 인물들은 목숨이 걸린 순간에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강철의열제에서는 한 쪽 팔이 잘린 천유화가 부상병들과 퇴각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동료들이 포위망을 뚫을 수 있도록 적진에 돌진하다가 죽어나갔다. 광풍가에서는 주인공이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스스로 미끼가 되어 시간을 끌다가 폭탄을 터뜨려 자폭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료를 지키기 위해, 자기 문파를 지키기 위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우리가 잘 아는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가분들께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태극기를 들었고, 폭탄을 투척했고,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전달하셨다. 


  언뜻 보기에 참 바보 같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수천 명의 어리석은 선택을 보면서 나라면 저 순간에 어떻게 했을까? 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했다. 아마 그 때부터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어떻게든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내가 피해를 보더라도 옳다고 믿는 가치관은 지켜야겠다고 믿어왔던 것 같다.


  대학생 때 볼링 동아리 회장을 하던 시절에는 다른 볼링클럽의 누님-어머니와 동년배셨으나 다른 선배들의 영향으로 나도 누님이라고 불렀다.-에게 심하게 개긴 적이 있었다. 다소 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아리 회장’으로써 동아리 선배를 스카웃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피해를 보는 것보다 내 신념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움 받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던 것 같다. 이미 죽음도 감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뼛속 깊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나도 기꺼이 죽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고 스스로를 세뇌했던 나에게 그까짓 미움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내가 힘든 순간마다 다가오는 유혹들이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포기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 말이다. 예를 들어 2016년 한 술자리에서 선배들은 취업 문제로 힘들어 하던 나에게 ‘아버지한테라도 부탁해. 그런다고 아무도 너 욕 안 해.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야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무렵 할머니와 이모들은 대놓고 아버지에게 ‘자기가 그 자리까지 갔으면서 지 새끼는 어찌되든 신경도 안 쓴다.’고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하셨다.


  이름만 들으면 알아주는 대기업 계열사의 대표이사의 위치에 있던 아버지라면 아마 내가 잘 부탁했으면 한 자리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2015년에는 아버지 덕분에 프로야구단에서 마케팅 인턴을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 이상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공정하지 못한 경쟁으로 취업할 바에는 차라리 굶어죽겠다는 게 내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 스스로의 역량이 편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형편없다는 생각에 자괴감도 들었기 때문에 더 더욱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와는 취업 관련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던 이유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무조건적으로 작가가 되겠다는 내 길을 반대해왔던 과거도 있었고, 1나노그람의 관심도 없는 중부발전이니 KT니 하는 대기업들이나 써봐라 하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부모님에게서 불공정한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내 신념 때문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2018년 우여곡절 끝에 취업에 성공하면서 어느 정도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업계 특성상 각오는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부조리했다는 것이고, 나는 그런 부조리를 참아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8개월 만에 퇴사를 하면서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작가의 길을 꿈꾸고 있다. 


  원하던 꿈을 다시 꾸고 있지만 여전히 내 자신을 갉아먹는 문제가 있다. ‘나이 서른이 넘었으면 자리를 잡고 부모님께 은혜를 갚아야지. 아직까지도 부모님께 손 벌리면서 사냐?’라는 내면의 목소리였다. 정신 못 차리고 부모님께 기대어 사는 일명 ‘등골브레이커’들을 경멸해왔던 내 입장에서는 모아둔 돈이 다 떨어져가는 상황이 닥쳐오니 그들과 내가 다를 바가 없어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친구들이 부모님 해외여행을 모시고 갔다는 이야기, 결혼한다는 이야기 등을 들을 때마다 아직까지도 부모님께 기대어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나는 뭘 하고 살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억지로 시키는 일을 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 훨씬 행복할거라고 믿었는데 생각보다 현실은 차가웠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회사 안이 전쟁이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랄까.


  코로나 때문에 모처럼 준비하던 것들이 다 어그러지고 있는 요즘 더더욱 자괴감이 들고 있다. 회사를 다니지 않고, 시험공부를 하지 않는 ‘준비생’은 그저 백수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정말 옳았던 것인가? 아니면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이니 현실적인 문제를 좀 더 고민했어야 했나? 하는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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