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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08. 2020

사극 좋아하세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원 없이 책을 봤기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10,000권을 넘게 읽었음에도 교내 백일장에서 상 한 번 못 탄 것을 보면 이렇다 할 필력은 없었다. 그렇게 소설가라는 꿈은 그저 꿈으로, 일종의 버킷리스트로 남을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입시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고등학생이 되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 친구 K가 빌려온 무협 소설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창칼이 난무하고 피가 튀기는 무림 이야기.(그렇다고 내가 싸이코패스라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전쟁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무협 소설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무협소설에 빠져 들었고 다니던 책방이 망했을 때는 자전거를 끌고 가서 세뱃돈을 탈탈 털어 중고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때는 기말고사 기간이었는데, 빌려보던 책들을 소장한다는 생각에 설레서 시험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공부하기 싫어서, 무협 소설이 재미있어서가 아니었다. ‘무협 소설이라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위인전을 볼 때면 장영실, 문익점 같은 학자들은 재껴두고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을지문덕 같은 장군들의 이야기만 몇 번씩 읽었을 만큼 전쟁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꽤나 겁이 많았던 꼬마였던 내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삼국지의 영향이 컸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사촌형이 빌려준 삼국지 책을 시작으로 어림잡아 20종 가까이 되는 삼국지 시리즈를 종류별로 사서보고, 빌려봤던 것 같다. 삼국지에 심취한 나머지 앞집에 살던 형 하나와 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의형제랍시고 맨날 뭉쳐 다녔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어린 마음에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가 가장 큰 매력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의 나는 외동인데다가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의 사정상 혼자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게다가 이사를 갔는데 어린 내가 걱정된 어머니께서 함께 출퇴근을 하시며 전학은 가지 않고 전에 다니던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동네 친구들과도, 학교 친구들과도 교집합이 많지 않으니 아무래도 혼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꼬꼬마에게, ‘의형제’는 일종의 희망이었고, 구원이었던 것이다. 왠지 현실의 나는 피를 나눈 친형제는 없지만 나에게도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은 형제가 생길 것만 같은 그런 상상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랬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냥 삼국지가 좋았고, 전쟁 이야기가 좋았고, 무협 소설이 좋았을 뿐이다. 적토마 타고 달리며 적들을 쓸어 넘기는 관우가 x라 멋있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피가 튀기고, 창칼이 번뜩이는, 어떻게 보면 가장 잔인하고, 우리가 사는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라며 거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전쟁이야말로 가장 인간답지 않으면서,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계획을 세우고, 상대를 속이는 노력은 오늘날 스포츠와 다를 바 없다. 절대 배신할 것 같지 않던 친구가 사랑 때문에, 복수 때문에, 명예 때문에 친구의 등에 칼을 꽂고, 당연히 목숨을 살려 달라 애원하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도망쳐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들은 창칼만 없다뿐이지 현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사실 전쟁이니, 피니 창칼이니 해서 그렇지 요즘 유행하는 마블 시리즈도 무협 소설이나 삼국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블 시리즈도 결국 히어로와 빌런들이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치고 박고 싸우는’ 이야기니까.


  내가 삼국지를, 무협 소설을, 사극을 정말 사랑하는 이유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모습,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불 속에라도 뛰어드는 모습, 가장 인간다운 모습, 가장 닮고 싶은 모습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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