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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2. 2020

미운 오리 새끼도 날 수 있다.

Feat. 골든마이크 시즌 8

  2018년 하반기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스카이캐슬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수능이라는 인생 목표에서 당사자인 10대뿐만 아니라 부모님들 또한 절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겨보진 않더라도 도깨비니 태양의 후예니 하는 유명하다는 드라마들은 그래도 나름 챙겨보려고 노력했었는데 스카이캐슬만큼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극 중 ‘주남대 병원장이 아니더라도 엄마 아들 맞잖아요. 그냥 엄마 아들 하면 안 돼요?’라고 강준상이 주저앉는 장면을 보면서 끔찍했던 수험생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험생 시절 나는 문자 그대로 우아한 백조들 사이의 한 마리 미운 오리 새끼였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아닌, 딱 그저 그런 평범한 인문계 학생이었다. 모의고사를 보면 평균 3등급을 왔다 갔다 하는 딱 인 서울 중하위권의 성적이었다. 재수 끝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기쁘기보다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켰을까?라는 물음표가 먼저 떠올랐다.


   부모님이 서울대학교 배구부 CC 출신이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버지는 이름만 들으면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내셨다. 부모님께서 스카이캐슬에서처럼 ‘서울대를 가야 한다.’, ‘의대를 가야 한다.’며 압 박주신 건 아니지만 명문대를 가서 대기업을 가야 ‘성공’한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했다. 당연히 명문대니 대기업이니 하는 틀에 박힌 생활보다 재능도 없는 주제에 춥고 배고픈 소설가가 되겠다는 나는 못난 자식일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 임원이다 보니 아버지 주변 지인들과도 비교되는 일이 많았다. 누구 상무 아들은 서울대를 갔다더라, 누구 사장 딸은 연세대 갔다더라, 누구 회장 딸은 전교 1등 했다더라 하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만 지어야 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실패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없는, 성공가도만 달려왔던 아버지에게 자식의 대학 이야기는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모임을 다녀오신 후에는 어머니한테 ‘자식 얘기만 나오면 내가 쪽팔려서 할 말이 없다.’고 하신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쪽팔리다고 까지 말씀하신 이유는 단순히 내가 공부를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아버지와 달리 나는 아무 생각 없는 철부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대충대충 공부를 하느라 수행평가를 기간 넘겨서 내는 것은 기본이었고, 졸리면 자고, 예체능처럼 조금만 어려우면 쉽게 포기하는 나와 달리 아버지는 음악 실기 시험이 있는 날이면 밤을 새워서라도 마스터해가는 분이었다.


  수능 만점자들이 인기 연예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PC방을 가면 인강을 듣는다는 말처럼 아버지 또한 공부 외의 모든 것들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무협소설에 빠져 있던 내가 소설을 본다거나 새벽에 카페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채팅을 하는 모든 행동들 또한 쓸데없는 짓이었고,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짓이나 하는 나는 한심한 놈이었다.


   수능 100일을 앞두고, 친구들끼리 마지막 우정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수능이 끝나 20살이 되는 첫 일출을 친구들과 함께 맞이하겠다고 했을 때도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내 인생에 도움도 안 될 친구들과 엮이지도 말라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대학교 입학 후에는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으셨지만 동아리 활동하고 술 먹고 다니는 것들을 매우 못마땅해하셨다.


   뿐만 아니라 사소한 실수조차도 용납하지 않으셨는데 한 번은 핸드폰 번호가 바뀌고 바뀐 번호를 저장하시라고 대충 문자를 하나 보냈더니 오타가 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문자 하나 제대로 보내지 못하느냐고 화를 내셨고, 나는 문자 하나 제대로 못 보내는 천하의 한심한 놈이 되어 있었다.

 

   내 기준에서는 정말 사소하고,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상황들에서조차 아버지께서 화를 내고 못마땅해하는 행동들이 많다 보니 점점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버지에게 혼날 것 같으면 아예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수능이 끝난 겨울, 부모님과 함께 밤기차를 타고 여행 갔다가 다리에 화상을 입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살이 익어 가는지도 모르고 기차 라디에이터에 발을 갖다 댄 채 곯아떨어진 탓에 3도 화상을 입고도 차마 부모님을 깨울 수가 없었다. 내가 봐도 한심한 짓거리라 혼날 것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차에서 내려 다리가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고도 끙끙 앓고만 있던 날 본 아버지는 황당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 한심한 마음 등이 뒤섞인 표정으로 하늘만 보셨다. 결국 초기에 치료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화상 전문 병원에서 수술까지 해야만 했었다.


  그때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아 아직까지도 내 왼발에는 흉터가 새겨져 있다. 흉터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모님께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또다시 혼날 것 같아서, 한심하다고, 쓸데없는 짓 한다고 혼날 것 같아서. 대학교 입학식, 졸업식, 토익 시험, 면접 같은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할 얘기만 할 뿐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를 가는지 사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하지 않게 되었다.


   취업 준비하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쳇바퀴 도는 듯 한 일상이 답답해서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는데 그렇다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취업을 한 상태라 늦깎이 취준생과 놀아줄 친구도 거의 없었다. 자연스레 스터디나 면접이 없는 날이면 혼자 집 앞의 PC방에 처박히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부모님께는 ‘친구 만나고 와요.’라고 둘러대고 말았다. 어머니가 ‘누구 만나러 가니?’ 물어보셨지만 “내가 누굴 만나든, 뭘 하든 항상 한심하다고 할 건데 내가 무슨 말을 해? 난 얘기 안 할 거야.”라고 딱 잘라 말했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내심 서운해하셨지만 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30년을 살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취업을 했지만, 8개월 만에 퇴사를 하면서 부모님께 재취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글쓰기 스터디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 강사와 작가를 준비하기로 했다. 워낙 힘들게 회사 생활을 하기도 했고, 30이 넘은 나이에 어중간한 경력으로 재취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보니 부모님께서 마음에는 안 들더라도 마냥 반대를 하진 않으셨다.


  퇴사하자마자 백승권 대표님이 운영하는 B.W.C.에서 글쓰기 강사 양성 과정을 수료했지만 현실의 벽이 높다는 것만 깨닫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글쓰기 관련 책도 사서 보고 독서 모임도 하면서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말이 좋아 글쓰기 강사 준비, 작가 준비지 백수나 다름없는 생활이 반복되자 부모님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니 나조차도 놀고만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그나이트 청춘 무대에 어머니를 초청했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노는 건 아닙니다.’ 정도의 시그널이랄까.



  대학교 수업에서 아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발표가 아니라 그 날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내 스토리를 얘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열심히 준비한 덕분인지 반응이 좋았다. 내 스피치가 끝나고 진심이 느껴져서 좋았다고 말해주시는 분도 계셨다. 결정적으로, 어머니께서 기분이 남다르셨는지 장문의 카톡을 보내주셨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가장 빛난다고 느꼈어. 책 읽고, 강연하고, 가장 너다운 모습이었어. 바보 같은 엄마 때문에 많은 시간과 감정들을 허비하게 해서 미안해.”


  무려 32년 만에 부모님께서 시험 성적이나 면접 결과가 아니라 내가 밖에서 하는 활동에 대해서 칭찬해주고, 공감해주셨다. 여기서 끝났다면 훈훈한 미담이었겠지만 내가 청개구리라서 그런지 어머니의 카톡을 받았을 때 기분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 났다.


  “이제 와서? 30년 동안 그렇게 내가 글 쓰고 싶다고,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다고 했는데 그땐 그렇게 반대하더니 이제 와서? 뭐 하러?”


  너무도 쉽게 대기업 직장인이 아닌 작가라는 내 꿈을 응원해주시는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이해해주실 거였으면 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재수까지 해서 한양대를 가고, 3년씩 스트레스받아가면서 취업 준비를 해왔던 거지? 도대체 왜?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반응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때 집에 있던 이중장이 눈에 들어왔다. 잊고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못마땅해하고 반대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응원해주셨던 것도 많았다. 일반 가정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이중장을 둬야 할 만큼 책을 원 없이 사서 볼 수 있게 해 주셨고, 철마다 여행도 데리고 가주셨다. 취업을 준비할 때는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카피라이터나 기자를 해도 잘할 거야.’라며 응원도 해주셨었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부모님께서도 알고 계셨는데 정작 나는 부모님을 위해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 아등바등 살아왔었다. 어쩌면 나는 내 스스로를 믿지 못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흔한 교내 백일장에서조차 상 한 번 타지 못했으니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재능이 없으니 밥을 벌어먹고 살진 못할 거야.’라는 강박관념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예능 미운 우리 새끼들의 이상민, 김종국 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미운 우리 새끼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흔히 우리 사회가 말하는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들이다. 노총각이거나, 이혼을 했거나, 빚이 많거나, 평범하지 않은 취미를 갖고 있거나. 미우새에 나오는 어머님들은 그들의 아들을 못마땅해 하지만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멋있다고 느꼈다. 단순히 돈이 많고, 유명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운동 등에 자부심을 갖고, 정말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상민이 68억 원이나 되는 빚을 지고도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음악의 신’이라는 프로가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스스로가 ‘음악의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재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가 아니었다.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글쓰기를 정말 좋아했었지만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계속 도망쳤었는데, 아니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내 글을 본 누군가는 용기를 얻었고, 누군가는 동기부여가 된다고 말해주었다. 한 번도 칭찬해준 적이 없던 부모님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인정해주셨다. 이중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을 읽은 만큼, 달력의 스케줄이 빽빽할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시간만큼 내게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나는 미운 오리 새끼다. 서울대 CC인 부모님과 달리 한양대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고, 대기업 임원까지 올라갔던 아버지와 달리 중소기업에서 8개월밖에 채우지 못했다. 백일장, 공모전에서조차 입상한 경력도 없고 출판한 경력은 더더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당당하게 출발선에 섰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믿으니까.


  나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미운 오리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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