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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1. 2020

동행이라 다행이야

2019 이그나이트 청춘

    여행도 제법 다녔고,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지만 인물 사진보다는 풍경 사진을 찍는 걸 더 좋아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주로 혼자 다니다 보니 누군가를 찍어주는 것도, 누가 나를 찍어주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행뿐만이 아니라 초등학생 때부터 혼자인 시간이 익숙했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사정상 1시간 거리의 학교를 다니다 보니 학교 친구들과도, 동네 친구들과도 깊게 어울리지 못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놀고, 혼자 학원에 가는 게 당연했고, 그렇게 뭐든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에 와서도 동아리를 2개나 했지만 친구들과 수강신청 시간표를 맞춘다거나, 끼니마다 함께 먹는다거나 졸업요건인 사회봉사를 같이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혼자 수업 듣고, 혼자 밥 먹는 게 익숙하다 보니 굳이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영학 전공 대신 관광학부니 사학과니 타과 전공을 들으러 경영대 밖으로 돌곤 했었다.

     

   그래서 내 스스로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져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힘든 일이 있어도 100%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데 굳이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다들 자기 고민하기 바쁜데 의지할 수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15년 네팔 해외봉사를 갔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친구들은 그 돈 주고 네팔을 왜 가냐, 차라리 유럽, 미국을 가라 했지만 난 꿋꿋하게 네팔을 선택했다. 유럽에 가봐야 사람 북적이는 도시에 별 흥미도 없는 관광지가 뻔한데, 아름다운 히말라야를 직접 보고, 걷는 기회랑 비교할 수 없었다.     


  역시 네팔은 기대 이상이었고, 모처럼 제대로 힐링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히말라야도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트래킹을 시작하면서 백두산도 종주해봤다는 자존심에 앞장서서 걸었지만 오랜 시간 등산을 쉬면서 무거워진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70년 만의 폭설은 길을 지워버렸다. 맨 앞에 나선 사람들은 눈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 길을 만들어 나가야 했는데 생각보다 체력이 급속도로 고갈되었다. 결국 나는 점점 맨 뒤로 처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셰르파가 내 배낭을 뺏어가 대신 매주 었다.     


  왠지 모르게 분했고, 쪽 팔렸다. 셰르파가 나를 무시한 것 같았고, 맨 뒤로 뒤쳐진 내 모습이 그만큼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헤드랜턴이 없다는 핑계로 나는 거기서 주저앉았지만, 나보다 어린 여자아이들도 야간 산행까지 하며 최종 목적지인 마낭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버킷리스트인 히말라야 트래킹을 마쳤는데도, 아쉬움이 남았던 이유다.       


   한국에 돌아와서 봉사에서 찍은 사진과 후기들로 포토북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서영이란 친구는 ‘앞서 가는 사람들,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눈과 추위와 더러움을 이길 수 있었다’고 후기를 남겼다. 석환이라는 친구는 ‘음식’을 주제로 찍은 사진에서 우리 식사를 준비하고 뒷정리하느라 늘 늦게 먹고, 대충 먹으면서 또 많은 짐을 지고 산을 올랐던 셰르파들의 모습을 공유해주었다.    

 


   난 한 팀이면서도 철저하게 혼자 걷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내가 빠지면서 낸 길을 그 친구들이 편하게 걸었고, 뒤쳐진 나는 다시 그 친구들의 길을 따라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셰르파가 나를 무시해서 배낭을 뺏어간 게 아니고, 셰르파가 배낭을 들어준 덕분에 늦게라도 합류할 수 있었다. 늦게 도착했을 때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않는 대신 걱정해주고, 저마다 가진 귤과 따뜻한 차를 나눠주었다. 난 좋은 친구들과 셰르파들과 함께 걸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루쉰이라는 중국 작가의 ‘고향’이라는 책의 구절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루쉰은 그의 책에서 “희망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그것은 마치 대지 위의 길과 같다. 처음 땅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누군가 그 길을 걷는 사람이 하나둘 많아지면서 없던 길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두고 한 얘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똑같았다. 셰르파가 눈이 오기 전 사진을 보여줬는데 길이 정말 깨끗했다. 아스팔트 포장은 아니어도 오토바이가 다닐 수 있어 보였다. 다만 최근에 폭설로 인해 그 길이 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그 마을 사람들이 오르내리면서, 우리처럼 트레킹을 온 다른 팀들이, 그리고 셰르파분들과 서영이, 석환이,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함께 트레킹을 하면서 새로운 길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살다 보면 항상 시속 100km를 밟을 수 있는 뻥 뚫린 고속도로만 만날 수는 없다. 자동차는커녕 오토바이조차 지날 수 없는, 밟으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만날 때도 있고, 눈사태나 홍수로 길 자체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그 길을 갈 수 있는 건, 없어진 길 대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끝내 정상에 태극기를 꽂을 수 있는 이유는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늘 혼자였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내려면 힘들어도 혼자 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힘든 순간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옆에 있었다. 재수하면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1시간 이상 거리를 달려와 밥을 사주고, 모의고사 때마다 응원의 문자를 보내주고, 수능 날에 맞춰 합격 엿을 보내주던 친구들이 있어서 무사히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2017년, 10년 넘게 모시고 살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산에서, 여주에서 퇴근 후 막차 타고 올라와 기꺼이 운구를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다.     


  퇴사를 하고 글쓰기를 강사를 준비하는 지금도 많이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하지만 잘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부모님이 계시고, 내가 쓰는 글마다, 하는 이야기마다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었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이그나이트 청춘이라는 무대에 서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내가 네팔에 갔던 2015년 영화 ‘히말라야’가 개봉했을 때 엄홍길 대장의 인터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정상에 선 나 한 사람만을 기억했지만, 나만큼은 함께 올랐던 동료들을 기억해야 했다.’ 왠지 혼자 걸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혼자 걷느라고 지쳐있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래서 함께 걷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갑 속에 사진을 새로 끼워 넣었다. 풍경 사진 대신 네팔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걸어준 사람들의 사진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 글을 읽는 지금 많이 지치고, 힘들다면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면 어떨까. 지금 누구와 함께 걷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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