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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1. 2020

재능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흔들리는 이유

   대기업을 가지 않아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향해 무모한 도전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악, 미술, 체육, 조립, 설계, 과학, 회계 등의 모든 분야 중에서 그나마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이유다.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센 성격이지만 가끔씩 흔들릴 때가 있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의 벽을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 초창기 황제 임요환에게 밀려 2인자에 머물렀던 홍진호는 ‘2등도 잘한 거야’라며 울분을 토한다. 홍진호의 말마따나 수십, 수백 명의 프로 선수들 중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는 것 분명히 훌륭한 업적이다. 슬프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1등만 기억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2,3등에게도 관심을 갖는 사람들조차도 ‘그래도 1등이 낫겠지’라는 기대심리를 갖고 있다.

  1등만 기억하는 사람들 때문일까. 마케팅 불변의 법칙에서도 첫 번째는 리더십의 법칙부터 여러 차례 1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은 것보다는 최초가 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의미다. 두 번째 법칙은 영역의 법칙으로 최초가 될 수 없다면 최초가 될 수 있는 시장을 개척하라는 뜻이다. 세 번째 기억의 법칙도 최초와 관련이 있다. 시장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최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1등만 기억하니까 제일 빨리 하거나, 제일 빨리 할 수 있는 것을 찾거나 그도 안 되면 제일 빨리 한 척하거나 찾으라는 의미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흔히 스포츠, 예술, 학습 등 분야를 막론하고 2등까지는 피나는 노력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1등,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피나는 노력은 기본이고, 경쟁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좋은 라이벌이 있다면 서로에게 자극을 받아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더 성장할 수도 있다. 2010년을 전후로 등장한 ‘택뱅리쌍(김택용, 송병구, 이제동, 이영호)’이 대표적이다. 안타깝게도 라이벌이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의 차이가 느껴질 때, 사람들은 깊은 절망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음모론이 도는 이유고, 삼국지연의에서 주유가 하늘은 왜 나를 낳고 제갈량을 낳았냐며 피를 토하고 죽은 이유다.


  나는 태어나서 분야를 막론하고 단 한 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 달리기 시합을 하면 6명이 뛰면 5등, 5명이 뛰면 4등을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어왔었다. 욕심이 없었다. 음미체 뿐만 아니라 과학이나 몇몇 암기과목들 모두가 그랬다. 어차피 잘 못하는 과목이고, 좋아하지 않으니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유일하게 신경 쓰였던 건 글쓰기였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으니까 기회가 될 때마다 학교 문집을 만들 때도 참여했고, 백일장을 쓸 때도 열심히 썼고, 수기 공모전 같은 것이 있을 때면 곧잘 도전했었다. 단 한 번도 입상조차 못하면서 글쓰기조차 재능이 없는 건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대학교 때 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의문이 확신이 되었다. 나보다 훨씬 잘 쓰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 친구들이 1면 이상을 빼곡하게 채워나갈 때 내 기사는 아이템 회의 단계에서부터 잘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다가 아이템 회의를 통과해도 수차례의 퇴고를 거쳐야만 했고, 당연히 내 기사를 잘 봤다는 피드백 한 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신문사 활동을 했단 이유로 수업에서 제출하는 보고서를 도맡아 쓰면서 ‘글을 잘 쓰는 재능은 없어도 못 쓰는 건 아닐 거야.’라고 위안을 삼긴 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자기소개서들이 광탈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취업한 친구들을 보여주니 ‘무슨 소리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반응까지 들었다.


  진짜 심각하게 현타가 왔다. 다른 모든 걸 못해도 그나마 글쓰기는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글쓰기조차 형편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취업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도 커졌지만 과장 조금 보태서 내 존재가치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친구에게 냉정한 피드백을 받고 글쓰기 스터디를 꾸준히 한 덕분인지 8개월 만에 취업에 성공하면서 밑바닥을 쳤던 자존감이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 같이 스터디 하는 사람들한테 종종 피드백 고맙다는 말, 글 잘 봤다는 말 등을 듣기도 했으니까.

   최근 들어서 두 번째로 심각한 현타가 찾아왔다. 한국방송작가교육원에서 드라마 작가 수업을 듣고 있는데 대본을 기한 내에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게으르다면 게으른 탓이겠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쓰는 내내 ‘아 이건 내가 봐도 재미가 없는데, 망했는데...’ 하는 생각에 도저히 키보드에 손을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건 그 이상의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짜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새로운 대본을 완성하지 못하고 기존에 썼던 대본을 적당히 수정해서 제출했고, 결과는 혹평이었다.


   진지하게 지금이라도 다시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취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책장에 꽂힌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퇴사하고 작가와 글쓰기 강사를 준비하면서 제대로 공부해보겠다고 잔뜩 사들인 글쓰기 관련 책들이었다. 태생적으로 게을러서 볼링을 10년 넘게 치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10년 넘게 했지만 생전 이론서 따위 쳐다보지도 않을 만큼 이론 공부를 하지 않는 나였는데 글쓰기만큼은 달랐다. 교육원을 다닌 다음부터는 드라마 작법 관련 책도 사서 보고 있고 드라마 스터디를 하고 독서 모임을 하면서 어떻게든 인풋을 늘려보려 발버둥 치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좋아하는 분야에서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큼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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