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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2. 2020

우리는 증명해야만 한다.

   오버워치를 하다 보면 팀 보이스를 켜는 것은 필수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같은 팀원들의 궁극기를 연계해서 효율적인 전투를 하기 위해서다. 확실히 팀원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게임을 하면 목소리를 듣지 않을 때보다 게임에서 이길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에 재미있게 게임을 할 수 있다. 잘했다는 칭찬과 고맙다는 인사도 바로바로 받을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다.


   문제는 간혹 가다가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팀 보이스에서 실수를 하거나 실력이 떨어져 보이는 팀원들에게 막말을 한다는 것이다. 팀 보이스를 끄더라도 채팅으로도 실시간으로 욕설이 난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데 팀 단위로 진행되는 오버워치의 특성상 이런 사람들을 피하는 경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밌게 즐기자고 하는 게임인데 부모님 안부를 묻는 소리를 듣다 보면 게임에서 이겨도 짜증이 솟구치는 경우가 꽤나 많다.


   팀 보이스든, 채팅이든 지나치게 막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신고할 경우 게임 개발사인 블리자드 측에서 해당 유저에 대해 제재를 하긴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를 하다 보니 100% 통제가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김없이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손이 덜 풀렸는지 아니면 너무 잘하는 상대를 만나서 그랬는지 평소보다 훨씬 못 미치는 실력을 보여줬고, 그 모습을 보던 팀원들의 욕이 득달같이 날아왔다. 부모님 안부를 묻는 것부터 해서 그러니까 내 인생이 그 모양이라며 오만가지 욕이 날아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텐데 그 날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어서 해당 유저들을 비매너/욕설 행위로 블리자드에 신고했다.


   다음 게임에서는 신기하게도 원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게임에서도 이길 수 있었다. 팀원들도 나에게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칭찬해줬는데, 아이디가 낯이 익었다. 불과 10분 전에 내가 비매너/욕설로 신고했던 그 유저들이었다. 웃음만 나왔다.


   그들은 내가 그 전 판에 욕을 미친 듯이 먹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사과를 했을 텐데... 아니면 알았더라도 사과를 해야 한다는 기본 예의가 없으니 다짜고짜 욕을 했었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게임을 하다 보니 별의별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내 가치와 내 실력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의 게임을 하는 동안 내 근본적인 실력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바뀌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내 성적만 가지고 나를 평가했을 뿐이다.


   수능 시험을 준비할 때도 비슷했다. 고 3 때나 재수할 때나 나는 꽤나 많이 놀았다.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때면 모니터 한쪽에는 항상 메신저가 실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스트레스를 푼다는 이유로 만화책과 소설책을 잔뜩 쌓아놓고 보고 있었다. 우습게도 수능 성적이 그리 높지 않았던 고 3 때의 나는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재수할 때는 ‘열심히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고 3 때는 친구들과 어울릴 때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한다며 잔소리를 시전 하시던 부모님은 재수하는 나를 위해 우리 동네까지 놀러 와 주기적으로 밥도 사주고, 당구도 치며 시간을 보내준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하셨다. 오히려 재수할 때는 술맛까지 알아서 더 많은 시간을 친구들과 보냈는데도 말이다.


    흔히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말처럼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의 실력이나 가치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추레한 외모만 보고 고객을 무시했던 명품 판매원이 알고 보니 진짜 부자였던 사람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 추레한 외모에도 친절하게 대해준 레스토랑 직원이 큰 금액의 선물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은 너무도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처음 본 상대방을 일반적인 경험, 혹은 지극히 개인의 경험에 빗대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경험은 가시적인 결과물을 말한다. 지난 겨울 코로나가 한창 심각했을 때 한 여행자가 외국 공항에서 여권에 찍힌 ‘대구’, ‘경북’이라는 주소지만 보고 입국 금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여행자 입장에서야 고향이 대구, 경북일 뿐 10년 넘게 다른 지역에서 생활해왔으니 억울할 수 있겠지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외국의 검역 당국 입장에서야 일단 금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로 증명하는 것은 너무도 쉽다. 게임을 하다 보면 ‘나 원래 다이아인데~’처럼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기가 유명인 누구와 친하다고 하거나 PPT 잘 만든다, 돈이 많다와 같은 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말로 자기 PR 하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 그만한 성과를 낸 적이 없거나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기꾼들이다.


   설령 내가 진짜 실력이 뛰어나고, 재산이 많다고 하더라도 사기를 당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기를 당할 위험이 있다면 피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여권 주소지가 대구라 코로나를 의심한다면 코로나 검사를 통해 음성 판정을 받아서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취업을 위한 면접이나 기업 간의 경쟁 PT를 준비할 때도 우리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오해한다면 당연히 기분은 나쁘고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사람들은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잘 모르는 처음 본 사람들일 가능성이 훨씬 많다. 그들이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고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한 것뿐이다. 나를 오해하지 않도록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때, 비로소 서로 간의 믿음이 생기고 관계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퇴사를 하고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며 하루하루를 드라마와 유튜브만 보는 내 모습은 내가 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옛날 같으면 등짝 스매싱이 날아오면서 잔소리를 한 바가지 먹었을 테지만 요즘은 별말씀 안 하고 넘어가신다. 작년에 부모님을 모신 두 번의 외부 스피치 무대에서 가능성을 보여드렸기 때문이고, 매일 같이 블로그에 올리는 글을 통해서 마냥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드렸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로 문제로 얼굴 붉혀가며 부모님과 싸워왔는데 허무하리 만큼 해결책은 간단했다. 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과거와 달라진 세상을 보여드린 그 짧은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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