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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6. 2020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지난 7월부터 크리에이터 클럽에서 두 번째 시즌을 시작했다. 4-6 시즌 ‘쓰다 보면’ 팀을 하면서 꽤나 재밌었지만 이번 시즌에는 본격적인 글쓰기 강의 준비를 위해서 ‘기름붓기’ 팀으로 옮겨갔다.


모든 모임이 그렇듯 첫 모임에서는 소개팅 첫 만남만큼이나 어색한 가운데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왜’ 기름붓기 팀을 하게 되었는지, 기름붓기 팀을 하면서 ‘어떤’ 습관을 만들고 3개월 후 ‘무슨’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기름붓기 팀 특성상 대부분의 멤버들이 슬럼프에 빠져 있거나, 목표는 세우는데 번번이 실패한 경험들을 갖고 있었거나 다시 열정을 불태우고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했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 외에도 12명의 멤버 중에 5명 정도가 ‘쓸데없는 일에 쓰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라고 말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자기 전에 유튜브를 본다거나 SNS를 뒤적이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는 것이었다.            


유튜브나 SNS가 아니더라도 쓸모없다, 쓸데없다고 평가되는 일들은 꽤나 많다. 특히나 수능을 인생의 지상과제로 삼고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공부’ 외의 모든 활동은 쓸모없다고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고등학생 때 무협 소설에 한창 빠져서 소설 커뮤니티를 들락날락하던 내 모습을 본 아버지께서는 “북풍인지 지x인지 네 인생에 도움도 안 되는 걸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거냐.”며 불같이 화를 내셨었다. 담임은 잊을만하면 저 새끼처럼 맨날 소설책 들여다보는 새x들 치고 대학 잘 가는 새x 본 적 없어. 저 새x가 인서울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 해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했으니 담임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겠지만, 난 아버지나 담임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하면서 수능 공부만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강요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부모님은 내가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대부분 지방대를 갔다는 이유로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될 친구라고 비난했고, 학교에서도 매일같이 술 먹고, MT나 다니는 내 행동들을 못 마땅해하셨고,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갔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히 공부하기 싫은 사춘기 소년의 철없는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공부보다 친구를 만나고, MT를 가는 일상이 더 재밌었기 때문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대신 어른들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친구를 만나든, 소설을 읽든, 게임을 하든 어떻게든 그 안에서 ‘쓸모’를 찾아내기 위해서 기를 쓰고 노력했다.


결과론적으로 졸업하는데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후배들마저 하나둘 취업하는 동안 면접에서 연신 패배의 쓴맛을 맛봤으니 내가 시간을 허비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취업은 했으나 2018년 불미스러운 일로 퇴사를 하게 되었고, 애매한 경력에 30살이 넘은 나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취업을 다시 준비한다고 해서 된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나보다 어린 선배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며 막내 노릇을 할 자신도 없었다.


퇴사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글쓰기 강사와 작가를 준비하게 된 이유다. 학교 백일장에서조차 상 한 번 받아본 적 없지만 3년 동안 450편이 넘는 글을 쓸 만큼 글쓰기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일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배우고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취업 준비를 하기 싫어 도망친 패배자의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2019년 이그나이트 청춘이라는 스피치 무대에 오르면서 약간의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대규모의 공신력 있는 무대는 아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말할 기회를 잡았고, 사람들도 내 이야기에서 ‘진심’이 느껴진다며 좋아해 줬기 때문이다.

무대를 준비하던 친구들과 리허설을 하면서 내가 했던 피드백들이 그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도 큰 수확이었다. 이문열처럼 글을 잘 쓰지는 못해도 누군가의 글쓰기를 도와주는 글쓰기 강사가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엿봤기 때문이다.


가장 큰 수확은 어머니의 한 마디였다. 스피치를 하면서 루쉰이라는 작가의 ‘길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는 구절과 엄홍길 대장의 ‘세상 모두가 정상에 오른 나만을 기억할 때 나만은 함께 걸었던 동료들을 기억해야 했다.’는 구절을 인용했는데 어머니가 좋게 봐주신 것이다. 스피치가 끝나고 어머니는 “넌 그런 문구들을 다 어디서 찾았니?”라고 물으셨고 유튜브에서 다모 드라마 명장면을 보고 따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맨날 유튜브 보고 노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도움이 되었네.”라고 말씀하셨다.

무협 소설이든, 드라마든, 예능이든 어른들이 쓸모없다고 말했던 모든 것들에서 의미를 뽑아내려고 노력했던 습관이 드디어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이그나이트 청춘 무대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순간에서 의미를 뽑아내려는 노력 덕분에 캠핑 클럽(예능), 오버워치(게임), 삼국지(소설) 등 내가 봤던 모든 것들을 소재로 글을 쓸 수 있었다. 3년 동안 함께 글을 쓰던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소재가 없다고 고민할 때 소재 고민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여전히 누군가는 “그래 봤자 출판을 한 것도 아니고 돈이 되지 않잖아?”라며 소설이나 예능, 드라마를 보는 시간들을 쓸모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나 역시 그 고민을 완벽히 떨칠 수는 없었다. 그때 ‘슬램덩크 인생특강’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슬램덩크라는 만화책에서 인생의 교훈을 느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누군가는 만화 속 농구부 감독들을 보며 ‘리더십’에 대해서 말했고, 누군가는 ‘조직문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말했으며, ‘성장’과 ‘성공’을 향한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하는 이도 있었다.

아마 대다수의 어른들은, 그리고 수능 공부를 앞둔 학생들은 ‘그까짓 농구 만화’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슬램덩크를 과연 그까짓 농구 만화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소개해준 서대웅 소장님은 슬램덩크를 보면서 느꼈던 대로 ‘액션’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비록 실패했지만 슬램덩크의 작가인 이노우에 작가를 만나러 가겠다는 무모한 도전을 시도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브랜드 액셔니스트로서 기업 컨설팅, 강의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내가 보는 것이 교과서든, 만화책이든, 유튜브든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다만 그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과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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