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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9. 2020

뇌 구조가 달라서(feat. 아웃사이더)

   외할아버지께서는 군대에서 어쩌다 휴가 나왔을 때조차 화투패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고 했다. 여든이 넘은 지금도 명절에 화투를 칠 때 온 가족이 무릎이 쑤시다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한 번도 내색을 앉는 분이시다.


  충남 청양에서 평생을 사시다 서울로 올라오신 친할아버지의 유일한 친구는 손때 묻은 화투패였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방을 들여다보면 알 수 없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화투패를 만지고 계셨다. 지금도 할아버지가 하시던 화투 게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누워 있거나, 화투패를 만지던 모습이다.


  그런 두 분의 핏줄을 못 속이는 걸까, 아니면 보고 듣고 배우고 자란 게 그런 거여서 그럴까, 손이 느려 스타크래프트니 오버워치니 하는 컴퓨터 게임은 영 잼병인 나도 화투를 비롯한 각종 보드게임은 곧잘 하는 편이다. 누구와 어떤 종류의 게임을 하더라도 카드를 가지고 하는 게임이라면 쉽게 룰을 익혔고 나쁘지 않은 승률을 기록했었다. DIXIT라는 게임만 제외하고.



   DXIT라는 게임은 일종의 심리전이다. 각자 6~7장의 카드를 나눠 갖고 돌아가면서 주제어를 제시하고 카드를 앞에 뒤집어 놓는다. 모든 카드가 모이면 카드를 오픈하고 주제어를 제시한 사람을 제외한 플레이어들은 그중에서 제시자가 냈을 법한 카드를 찾아야 한다. 주의할 점은 모든 플레이어가 제시자가 낸 카드를 맞췄을 경우 제시자는 – 점수를 얻고,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 점수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도 제시자의 카드를 못 맞췄을 경우에도 제시자는 – 점수를 얻는다. 이때 제시자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의 카드가 제시자의 카드로 지목받을 경우 그 플레이어도 + 점수를 얻는다.


   따라서 내가 제시자라면 너무 뻔한 주제어와 카드를 제시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난해한 주제어와 카드를 제시해도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제시자일 때도 최대한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카드를 골라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심리를 잘 파악한 사람만이 승리할 수 있는 게임이다.


   지난 11월에 이 게임을 우연히 하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제시자의 카드를 맞췄을 때도 나 혼자 다른 카드를 지목해 제시자 견제에 실패했고, 내가 제시자일 때 아무도 내 카드를 맞추지 못하는 일이 가장 많았다. 당연히 제시자가 아닐 때 내 카드를 선택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보드게임이 심리전이긴 하지만 DXIT의 경우 그 궤가 달랐다. 일종의 대중감을 테스트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극단적으로 말하면 타인의 생각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그런 게임이었다. 몇 번을 해도 번번이 뒤에서 1등을 차지한 나는 대중감이 제로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밝혀진 셈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늘 Dog쌍Myway로 살아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상에는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초등학교 때는 논스톱을 보러 집에 들어가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대학생 때는 아이돌 뮤비와 예능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여보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시간에 나는 무협 소설과 삼국지 게임에 파묻혀 있었다. 


   취향이야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관적인 판단을 해야 할 때였다. 내가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겠지 했던 상황들이 남들 눈에는 싸가지 없는 행동으로 비쳐서 선생님, 선배들에게 혼났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는 논술 시험을 본다거나 언어영역 문제를 풀 때마다 항상 점수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수십 수백 번씩 읽었던 소설 지문을 푸는데도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의도’, ‘~~이 상징하는 바’ 등은 늘 오답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Yes를 외칠 때 No를 외치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의 뇌 구조를 가졌던 셈이다.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남들과 다른 뇌 구조 덕분에 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했던 PPT 디자인들은 사수들에게 촌스럽다고 까였고, 내가 작성한 회의록이니 업무일지는 부족한 것 투성이었다. 나는 나대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수들의 일처리 방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나, 절이 싫다고 나그네가 절간을 폭파할 수도 없는 법이니 그들의 룰을 따라야 했다.


   언제부턴가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는 내 의견을 말하는데 매우 조심스러워졌고, 두 번 세 번 질문을 던지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내가 남들과 뇌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망각하고 내 임의로 판단해서 일처리를 하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혼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메모를 하고 머릿속으로 외워도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함이 남아서 두 번 세 번 체크하게 되니 사수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손도 느린 애가 일할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싶었을 터다.


  욕을 먹든 안 먹든 그나마 질문을 해서 답을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신박한 컨셉’이라든가 ‘세련된 디자인’ 같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의 요구는 어떻게 사수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영 컨설팅의 일환으로 제품 스토리보드 기획 업무를 담당했을 때 사수가 2,3개씩 처리할 때 나는 겨우 1개를 제작하는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사수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직접 다시 작업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결국 난 그 회사를 그만둬야만 했다.


왼쪽은 내가 디자인한 홈페이지, 오른쪽은 사수가 디자인한 홈페이지. 아직도 뭐가 더 예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동안 사수에게 있는 욕 없는 욕먹어가면서 참 힘들다고 생각만 했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DXIT 게임을 하면서 대다수 사람들하고 정반대로 노는 나의 독특한 뇌 구조를 새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야심 차게 도전했던 청년 강사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던 이유도 비슷했을 것이다. 담당 면접관님께서 정말 친절하게 본인의 노하우까지 공개하면서 설명을 해줬지만 내 머리로는 도저히 뭐가 다른 것인지, 무엇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답을 그릴 수 있다면 어떻게든 그 방향에 맞춰 갈 텐데 빌어먹을 남다른 뇌 구조는 연산을 거부했다.  


  원인은 알았으나, 해결책을 모르겠다. 남들과 다른 사고방식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굳어진 너무도 오래된 습관이기 때문이다. 해외에 나가서도 당황하면 무의식 중에 영어가 아니라 ‘엄마야’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내 무의식은 이미 남들이 오답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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