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입버릇처럼 들었던 말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의 고등학교 시절도 질풍노도의 시기 그 자체였다. 고1 때 무협 소설에 입문하면서 장래희망으로 막연하게 적어냈던 소설가라는 꿈이 현실이 될 것 같다는 기대를 키웠기 때문이다.
공부가 재밌어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나는 유독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을 싫어했다. 공부뿐만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일은 때려죽여도 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은 미친 듯이 파고드는, 극단적인 성격이었다. 예를 들면 심각한 개발이다 보니 반 친구들이 다 같이 축구하러 나가도 가끔씩 머릿수를 채울 때나 나설 뿐 웬만하면 나서지 않는다거나, 학부모 참관 수업 날조차도 졸리면 그대로 엎드려 자곤 했다. 대신 발표할 사람을 찾거나 질문할 사람을 찾을 때면 어김없이 손을 들고 주절주절 떠들고, 학급 문집이라도 만든다고 하면 가장 먼저 나서서 밤새워서 글을 쓰곤 했었다.
자연히 성적도 극과 극이었다. 1 나노그램도 관심이 없던 과학이나, 예체능, 기술 가정, 컴퓨터 쪽은 70점을 왔다 갔다 했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역사를 좋아했던 탓에 언어나 사회탐구 쪽에서는 점수가 90점을 왔다 갔다 했다. 과목마다 편차가 큰 탓에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 딱 한 번 평균 90점으로 반에서 8등을 했을 뿐 늘 10등~15등을 오가는 애매한 학생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내 성적표를 볼 때마다 혀를 차셨고, 도대체 왜 열심히 하지 않느냐며 화를 내셨지만, 난 굳이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과목을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이해할 수 없었다. 경제 과목에서 ‘각자 상대적으로 더 잘하는 것을 열심히 하자.’라는 비교우위 개념을 가르치면서 도대체 모든 과목을 잘해야 한다는 거지? 축구를 잘하는 놈이 있고, 컴퓨터를 잘 다루는 놈이 있고, 역사를 좋아하는 놈이 있고, 미술을 잘하는 놈이 있는데? 심지어 원소주기율표나 화음 따위는 몰라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지 않은가?
입학 첫날부터 말도 안 되는 0교시 수업부터, 야간자율학습이라고 말하면서 야간강제학습을 겪으면 불만이 많았던 나는 계속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실험용 쥐라고 부를 만큼 소위 말하는 중 2병에 걸려있던 나에게 무한한 상상이 가능한 무협 소설의 세계와 그 세계를 만드는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은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그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명문대나 대기업과 무관하게 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어디까지나 랜선으로 교류하던 이들이니 잘 사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무협 소설 작가들을 보면서 예체능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서 대학교를 굳이 가야만 하나? 대기업을 가야만 하나?라는 질문까지 생각이 확장되었다. 그때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때론 정신 안 차리냐고 협박하기도 하고, 대학만 가라고, 대학 가서 네 맘대로 해라며 나를 어르기도 했다. 커뮤니티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대학생 형들도 있었고 그들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고 있었기에, 난 ‘대학만 가라’라는 말이 헛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물론 모 영화 대사처럼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니 아무리 재미없고, 싫어하는 공부라도 할 필요가 있고,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나 같은 경우도 결국에는 재수까지 해서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아무리 소설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백일장 한 번 타보지 못한 내 필력으로는 감히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플랫폼이 다양한 시절도 아니었고, 특히나 무협 소설에 대한 인식은 쓰레기 취급이었던 시절이었기에.
대학교 입학한 후의 상황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부모님은 내가 읽는 소설,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동아리 활동 모든 것들을 못마땅해 하셨다. 그 어느 것도 취업에 도움 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난 “대학만 가라며. 가서 내 맘대로 다 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반대야?”라고 따지며 꿋꿋하게 술자리에 나갔고, 엠티를 갔으며, 볼링을 쳤다.
CC는 못 해봤지만, 매년 여름마다 지방 행사,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나름대로 대학생의 자유를 오롯이 누렸다. 다만, 제멋대로 논 것과는 별개로 고등학생 때보다 대학생 때 더 많이 방황했었다. 고등학생 때는 진로가 수능이라는 선택지 하나를 두고 Yes/No의 이지선다였면, 대학생 때는 서술형 주관식 문제가 주어졌지만, 답은 정해져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CPA 시험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 당시 경영학과는 크게 회계, 재무, 마케팅, 생산운영, 글로벌경영, MIS. 인사, 조직의 8가지로 전공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건 단언컨대 공인회계사 시험인 CPA였다. 정확히 말하면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야겠지만. 학교 차원에서도, 교수님들도, 선배들도 하나같이 ‘CPA’ 얘기뿐이었다.
내 동기들을 비롯한 선배들, 후배들 할 거 없이 거의 모든 경영학과생들은 한 번쯤 CPA를 염두에 두었고, 짧게는 1년, 길게는 몇 년씩 휴학도 하며 시험을 준비하곤 했다. 나를 비롯한 몇몇 별종들만이 CPA 시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뿐이다.
고액의 연봉을 보장받는 만큼 CPA 시험은 어려웠고, 몇 년씩 공부하고도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합격 여부와 별개로 CPA 시험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대기업에 성공적으로 취업했다.
반백수로 사는 지금 가끔씩 후배들의 대기업 입사 소식, 승진 소식, 결혼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때 CPA 준비를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CPA 시험에 붙진 못 했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취업은 잘하지 않았을까. 지금보다 통장의 여유는 많지 않을까?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보지만 내 선택은 No.였다.
난 천성이 사람들과 떠드는 걸 좋아한다. 짜여진 틀에서 반복되는 일상보다 급작스럽더라도 뭔가 새로운 일들이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성격은 급하고, 손재주는 둔해서 차분히 앉아서 꼼꼼하게 뭘 체크하는 일을 못 견딘다. 기초필수 과목이라 들을 수밖에 없었던 회계 원리 수업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비슷비슷한 계정과목을 따져가며 재무제표와 손익계산서를 보는 일도 어려웠지만, 반복적으로 계산기만 두드리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CPA 시험을 과감하게 포기한 이유다. 물론 앞서도 말했지만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고, 재미없고,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도 있다. CPA 시험은 노력한 만큼 보상이 확실한 나름 정직한 분야기도 했다. 하지만 나보다 회계, 재무 과목을 좋아하는 친구들. 잘하는 친구들조차도 탈락의 고배를 마실 만큼 어려운 시험이니 시험에 붙으려면 그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평생 재무제표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CPA 시험이 끝이 아니고 CPA 시험에 합격한 뒤에도 계속 노력해야 하는데 나보다 회계, 재무 과목을 잘하는 친구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었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하겠다는 이유로 과감하게 CPA 시험을 포기했지만, 연이은 취업 실패와 우여곡절 끝에 다닌 회사를 8개월 만에 퇴사하면서 내 생각이 틀렸나? 그래도 참고 열심히 노력했어야 했나?라는 의문을 품은 적도 있었다. 대부분의 내 동기들, 선후배들은 하기 싫은 일도 참고 열심히 해나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때 루시드 폴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유퀴즈에 나온 루시드 폴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루시드 폴은 서울대학교 응용화학부(화학공학과)를 졸업, 스웨덴 왕립 공과대학에서 Licientiate(준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스위스 로잔 연방공과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료했다. 단순히 학위만 딴 것이 아니라 재학 중에는 스위스 화학회에 논문을 발표해 한국인 최초의 최우수 논문 발표상을 받았는데 루시드 폴이 발표한 논문은 네이처지 화학 저널에 언급되고, 미국 화학 학회 회지에 게재되며, 루시드 폴은 이 논문으로 미국과 세계 특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미래가 보장된 세계적인 인재다.
하지만 루시드 폴은 그 모든 경력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제주도에서 귤 농사를 지으며 음악을 하고 있다. 속된 말로 미친 짓이다. 기껏 유학까지 보내서 박사까지 땄는데 그만두겠다니. 부모님들이 가슴을 치며 혈압이 올라가는 소리가 절로 들린다. 도대체 왜? 우리 모두가 갖는 질문을 유재석이 대신 던졌다.
루시드 폴과 달리 나는 길을 아예 걸어가지 않았지만, 아직 이뤄놓은 건 없지만, 루시드 폴의 말은 내가 했던 생각과 너무도 비슷했다. 부모님들은, 선생님들은, 어른들은 마치 대학 입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대기업과 전문직이 최고인 것처럼 말한다. 명문대에 진학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고, 전문직이 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술술 풀릴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CPA라는 자격증도, 화학 박사니 석사니 하는 온갖 학위도 끝이 아니다. 그저 시작일 뿐이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자격증을 딴 뒤에도, 입사 후에도 자기계발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그깟 종이 한 장은 어떤 미래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물론 종이 한 장이 미래를 보장해 주진 않지만, 종이 한 장이 있다면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번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일에 뛰어드는 일은 비효율적이다. 거북이가 수영에서는 토끼를 가볍게 이기겠지만, 달리기에서 이기려면 수백 배의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축구 선수가 아무리 많은 연봉을 받는다고 해도 허재나 서장훈이 축구 선수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허재나 서장훈같은 사람들은 농구 선수를 해야 한다. 축구 선수가 된다고 해서 끝이 아니고 계속해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한들 행복할 리가 없다.
시도조차 포기했던 내가, 아직까지 뭔갈 이뤄놓은 것 하나 없는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하기 위해 난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 계속 글을 쓸 생각이다. 내가 유일하게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내가 가진 어떤 재능 중에서 그나마 쓸만한 재능이니까. 그러니 부디, 수능을 마친 후배님들을 비롯해 진로를 고민하는 모든 분들도 보장된 미래라 불리는 종이 한 장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게 경쟁할 수 있는 미래를 꿈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