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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Jan 02. 2022

아버지의 핸드폰


‘어디세요?’


   며칠 전, 밤 11시가 넘었을 무렵, 예정보다 귀가가 늦어진 아버지께 카톡을 보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드셔도, 바쁘셔도 이 시간대는 바로바로 답장을 하셨던 분인데 이상했다.


   어쩌다 한 번쯤은 집 앞 엘리베이터에서 답장을 주셨던 적도 있었으니까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집 앞에서 친구를 만나고 오신다고 하니 별 일 없을 거라고도 하셨고.


   30분 쯤 지나서야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술을 드셨을 때 특유의 발소리와 엇박자로 도어락 누르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오셨다.


   “왜 답장 안 하셨어요?”

   “아... 답장... 아 핸드폰...”


   ‘핸드폰 어디 갔지?’와 ‘핸드폰 두고 왔네.’, ‘핸드폰 잃어버렸어~’를 반복하시던 아버지는 ‘내일 찾지 뭐’하고 그대로 거실 쇼파에 대자로 누우셨다. 술기운에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지는 못 했으나 드문드문 하시는 이야기를 조합해보니 1차로 가셨던 참치 집 혹은 2차 노래방 중 한 가게에 핸드폰을 두고 오신 듯 했다. 그리고 집에 거의 다 도착해서야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으셨고.


어머니가 아버지 폰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다행히 동네 참치 집 사장님이 받으셨고, 핸드폰을 두고 가셔서 챙겨두셨다고 했다. 부랴부랴 내가 달려 내려가 핸드폰을 받아 왔다.


   “약주는 많이 안 드셨던거 같은데...허허... 내일 쯤 오시려나 해서 일단 챙겨두고 있었죠.”


   아버지의 휴대폰을 받아서 올라오는 길. 이런 일은 전혀 없었는데... 아니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낯설었다.


   핸드폰을 들고 집에 올라오는 길에, 문득 ‘아버지가 늙으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청남도 청양의 시골에서 악착같이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갔고, 대기업 임원까지 지내면서 아버지는 한 치의 빈틈도 없던 분이셨다. 아버지 앞에서는 문자의 오타, 식사를 준비하다 흘리는 밥알, 코를 풀고 잠깐 쌓아둔 휴지 등도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께서는 주량이 그리 세지도 않고 술을 엄청 좋아하는 분은 아니다. 문제는 사회생활이라는 게 하다보면 마시기 싫어도 술을 마셔야만 하는 상황은 심심찮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늘 본인의 주량보다도 정신력으로 술자리를 버티셨다고 했다. 한 번은 거래처 직원을 접대하다가 둘 다 만취한 적이 있었는데 거래처 직원을 버려둘 수가 없어 만취한 상태로 차를 운전해서 집까지 데려오셨던 전설적인 경험도 있었다고 했다.


   이처럼 매사 철두철미한 아버지가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것은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일일뿐더러, 그 사실을 알고도 그냥 집에 돌아오셨다는 것은 더더욱이나 낯선 풍경이었다. 마치 내가 아무 부품도 부러뜨리지 않고 혹은 잃어버리지 않고 완벽하게 기계 조립을 마치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광경이랄까.


   단순히 그 날 따라 술에 더 취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정말 어디에서 핸드폰을 두고 왔는지 기억을 못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일 모레 환갑이 되실 만큼 세월이 오래 흘렀기 때문일 것이다. 핸드폰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몸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아니면, 그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지쳤던 몸이 휴식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내일 모레 아버지가 환갑이라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본인이 완벽하신만큼 한 치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늘 어려운 존재였다. 함께 여행을 가고, 고스톱이나 바둑 같은 취미를 함께 즐기며 시간을 보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날벼락을 맞았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육두문자도 없고 물리적 폭력도 없었지만 ‘한심한 놈’이자 ‘(완벽한)아버지 아들 자격도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 그 어떤 욕보다도 기분이 더러웠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등학생 때나 20살 초반처럼 한심하다거나, 부끄럽다거나, 아들 자격 운운하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일단 2012년 공익 근무를 마친 후부터 계약직 등 나름의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2016년의 취업 준비 시즌이 거의 마지막으로 한심하단 소리를 들었던 기억인데, 그 이후로는 없었다. 막연히 반쯤은 아버지의 기대치를 포기하시고, 반쯤은 나의 별난 성격을 인정하셨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 아버지께서 속으로 삭혀 오셨던 말들은 아마도 그만큼 나이를 드셨단 뜻이었다. 여전히 아버지는 사회생활도 열심히 하시고 매 주말마다 서울 둘레길도 걷고 계셔서 몰랐는데, 어느새 의욕도, 체력도 감퇴할 그런 나이가 되셨다.


   아버지께 혼날 때마다 기분이 정말 안 좋았지만 더 이상 들을 일이 없을거라 생각하니 뭔가 복잡미묘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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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9년 3월 15일의 기록이다. 어느 새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작년에 아버지가 심장 수술을 한 이후로 부쩍 더 나이가 드셨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매일 같이 출근하던 회사도 일주일에 1,2일 정도는 쉬시고, 대신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챙겨드시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 효도다운 효도를 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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