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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Feb 17. 2022

내가 슬프게 하는 사람들

그날의 기억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백승수는 제발 밝게 좀 살자며 형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동생 백영수에게 “네가 나였어도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냐?”라고 말한다. 백영수가 골반이 아프다며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고 그에게 전화했던 날 백승수는 ‘다 그런 거야. 앞만 보고 뛰어.’라고 동생의 전화를 끊었고, 그날 백영수는 베이스러닝 중 충돌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선수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도 쓰러지시고 임신한 아내마저 유산하게 되자 백승수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다. 

출처 : 스토브리그 8화 中

  동생도 더 이상 형 탓을 하지 않고, 아내도 남편 탓을 하지 않는데 백승수는 여전히 장남의 책임감. 동생을 다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아내를 돌보지 않았다는 미안함에 사로잡혀 있다. 길창주 부부가 아이를 안아보라고 권할 때도 ‘저는 아이를 안지 못합니다.’라고 울먹일 만큼.


  비록 나에겐 백승수처럼 가족을 책임질 만큼 능력이 있는 것도, 이 악물고 일할 근성도 없지만, 백승수의 마음만큼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웃는 일만 가득하게 해주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을 슬프게 했다는 죄책감은 그 어떤 말로도 씻기 힘들기 때문이다.


  30대 중반을 향해가며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한 나 역시 주변 사람들을 슬프게만 하는 존재니까.

  

  “아이고, 우리 손주 고생이 많나 보네. 살이 쏙 빠졌네.”


  몇 년 전이었더라. 할아버지께서 은행에 갔다가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 한 달음에 달려갔더랬다. 오랜만에 나를 본 할아버지는 내 걱정부터 하셨다. 동면을 준비하는 곰처럼 지방을 넉넉히 비축하느라 절대 살이 빠졌을 리 없건만 할아버지 눈에는 빠져 보였던 모양이다.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철 모르는 아이 마냥 잘 지내서 이보다 더 잘 지낼 수 없건만, 나를 걱정하는 그 말씀을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시면서 심하게 다치고, 얼굴의 피멍도 가시지 않은 채, 팔뚝에는 링거를 맞고 계신 분이 내 걱정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나를 걱정하실 만큼 내가 못났기 때문이다.


  나를 걱정해준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이니 그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겠지.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데 그게 날 더 힘들게 한다고 말하면 철부지 손자의 투정이라며 할머니는 호강에 겨워 요강을 타고 대동강을 건넌다며 등짝을 때리시겠지만, 글쎄. 나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운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는다면, 그것만큼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있을까?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아버지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기업에서 임원을 지내셨고, 작은 계열사의 대표이사까지 올라가셨었다. 소위 말하는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 2세는 아니어도 동 수저 정도는 물고 태어난 셈이다. 충청남도의 시골에서 상경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신 것만으로도 나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달라진 시대에 과거 아버지의 방식을 강요하시는 것이 싫은 것과 별개로 아버지의 노력과 성취는 존경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런 아버지가 할머니로부터, 이모로부터 ‘자식새끼 나 몰라라 한다.’는 소리를 들으셔야 했다. 집안의 제일 큰 손주가, 조카가 명색이 서울의 상위권 4년제를 졸업하고 이것저것 경험도 했는데 취업을 못하고 빌빌대고 있으니 답답하셨을 터다. 아빠가 대표이사씩이나 했으면 한 자리 힘도 써줄 만도 한데, 하다못해 좋은 팁이라도 줘서 취업이 되게 도와줄 법도 한데 도대체 뭐 하길래 아들이 저러고 있나 하셨을 터다.


  난 아버지에게 등록금과 생활비 지원을 받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내 능력이 아닌 아버지의 빽으로 취업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딱 한 번 아버지의 도움으로 야구장에서 인턴을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조차도 쪽팔려서 친구들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내가 그토록 경멸해왔던 높으신 분들의 취업비리, 병역비리의 당사자가 되어 똑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순도 100% 그 흔한 로비 한 번 없이, 사내 정치하기보다는 묵묵히 정도를 걸으며 실력으로 그 자리까지 가셨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능력이 부족해 아버지가 올라선 자리의 반의반도 못 따라가겠지만 적어도 아버지의 인생에 오점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내 앞에서 취업을 못한 내가 걱정된다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와 이모는 내 아버지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내 아버지가 답답하다고 했고, 서운하다고 했다. 나로 인해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아버지여야 할 분이 아들을 나 몰라라 하는 못난 아빠가 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취업을 했다가 퇴사를 하니 여전히 걱정은 더 심해지셨다. 내 친구들이 부모님 모시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했으니 참으로 늦었다 싶으니 걱정하시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마냥 새로운 진로를 준비만한다고 손을 벌릴 수 없어 백화점에서 판촉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이모님이 마트를 찾아왔고 때마침 손님을 응대하고 있던 터라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모님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이모님은 그날 집에서 엄청 우셨다고 했다. 할머니를 붙잡고 ‘저 바보 같은 새끼가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지 새끼 피하려고 일부러 빙빙 돌았는데 눈치도 없는 새끼가 뭘 잘했다고 꾸역꾸역 또 와요.’라며 엄청 우셨다고 했다.


  내가 무능력했을 뿐이다. 무능력한 내가 뭐라도 해보겠다고 아르바이트를 했을 뿐이다. 죄지은 것도 아니고 내가 그 자리에서 이모님을 피할 이유도 없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모님께선 어지간히 속이 상하셨던 모양이다. 며칠 뒤 나를 회사로 불러 마트 판촉 알바나 할 거면 행사 때 와서 일이나 도우라고 하셨다. 그조차도 일종의 빽이니 거부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알겠다고 몇 달을 출근했다.


  나를 위해 울어주시는 건, 정말 복에 겨운 일이다. 누군가는 주변에 지옥의 구렁텅이로 떠미는 사람밖에 없을 때 어떻게든 꺼내 주겠다고 손을 내밀어준다는 것은 로또와도 비교할 수 없는 행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이미 한 번 사회에서 무능력하다고 낙인찍힌 것으로 충분하다. 사회에서 무가치하다고 평가된 나를 위해 우는 일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병상에 누워 병문안을 간 나를 걱정하셔야 봐야 여든이 넘은 환자조차 나를 걱정할 만큼 무능력하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건 내 부모님으로 충분하다. 그분들이 무능력한 나를 낳고 길렀다는 죄만으로 우시는 것도 인정하기 싫은데 나로 인해 자식 교육 운운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형편없다는 뜻이다.

출처 : 스토브리그 10화 中

  백승수가 아내에게 ‘혹시 나도 좀 웃으면서 즐겁게 일도 하고 그렇게 지내도 될까? 아니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지내도 되나?’ 되묻던 장면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웃는 얼굴만 보고 싶었건만 한심하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웃지 못하고 울게 만드는 내가, 과연 웃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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