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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Feb 22. 2022

당신만은 나를 믿어주길 바랐는데

그날의 기억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있다. 술을 엄청 잘 마시지도, 좋아하지도 않지만 술자리 모임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상 예년 같으면 고등학교 동창이니, 대학교 동아리니, 동기 모임이니 송년회/신년회를 쫓아다니고 있었을 텐데 올 겨울에는 한 건의 송년회/신년회 모임도 갖지 못했다. 문자 그대로 사무실을 오가는 것을 제외하면 집에 틀어박혀 있는 동면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단순히 집에만 있기 때문에 답답한 것은 아니다. 유튜브니 웨이브니, 작년에 사고 미처 보지 못한 책 등 볼거리는 엄청 많고, 독립출판을 해보겠다고 원고도 써야 한다.


누군가는 번거롭게 집 밖에 나갈 필요 없으니 집에서 오롯이 집중하면 효율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나는 효율이 좋아지기는커녕 스트레스가 갈수록 극에 달하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부모님의 잔소리도 많아지셨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이상 부모님의 잔소리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숙명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일들로 잔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두어 달쯤 지난 어느 주말에는 식사 후 사과를 깎다가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개인적으로 손재주가 정말 없는 편이라 요리를 포함해 뭘 만드는 일을 나서서 하지 않는 성격이다. 어차피 내가 해봐야 맛없다는 소리나 들을 텐데 뭐 하러 사서 기분 나쁜 소리를 듣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신 요리를 위해 장 보러 간다거나 설거지를 한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일은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이다. 굳이 모든 것을 잘할 필요 없이 각자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지 않나? 요리를 못하는 사람한테 괜히 요리를 시켜서 맛없는 요리를 먹는 것보단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하는 맛있는 요리를 먹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 구글 검색 사과 깎기 


아니나 다를까. 내가 깎은 사과는 썩 예쁘지 않게 깎였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어머니는 ‘사과를 왜 그렇게 어설프게 깎냐. 남들이 사과도 못 깎는다고 뭐라고 하겠다.’라며 잔소리를 하셨다. 예상은 했지만 짜증이 확 솟구쳤다.


부모님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사과 하나조차도 제대로 깎을 줄 모르는 사람, 깎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줄 모르는, 받아먹는 것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내용의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일상에서 사과를 깎아야 할 일이 자주 있고, 사과 깎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사과를 깎을 줄 모른다거나 깎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소위 ‘곱게 자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일 것이다. 나 역시도 누군가가 사과를 한 번도 깎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곱게 자랐구나.’라고 생각할 테니까. 행여나 밖에 나가서 내가 그런 취급을 받을까 걱정이 되실 것이다.


중요한 건 사과를 잘 깎냐, 못 깎냐, 깎아 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이유로, 어떤 마음으로 사과를 깎지 못(안)하는 것인지가 중요하다. 나처럼 손재주가 무딘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사과 알레르기가 있어서 사과는 절대 먹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 사과를 깎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거나, 사과를 자주 먹을 만큼 형편이 여유롭지 못해서 사과를 깎아 본 적이 없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못 깎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마저 곱게 자랐느니, 이기적이라고 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시키면 ‘내가 왜요?’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문제다.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 귀찮은 일, 더러운 일, 덜 중요해 보이는 일 등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과 깎기 연습을 해서라도 고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누군가의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는 뻔뻔한 사람은 아니다. 만약에 내가 정말 호의를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껏 내 주변에 그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가 사과 한쪽을 건네줬으면 요구르트 하나라도 사서 건네는 성격이었기에 내가 사과를 깎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칼을 든 모습을 보면 어설픈 결과물을 알기에 그냥 내려놓으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밖에서는 그 누구도 사과를 못 깎는다고 해서 나에게 비난을 하는 사람도, 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데 정작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인 부모님은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라는 이유로 사과를 제대로 못 깎는다며 눈치를 주고,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는 뻔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 부모님이기에 더 화가 났고, 배신감이 느껴졌다.


우연히 보게 된 아이콘택트의 장광-장영 부자 에피소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이유다. 35살인 장영은 아직까지도 아버지 장광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만큼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다. 장광이 진솔하게 대화를 나눠보자고 말하자 장영은 조심스럽게 어렸을 적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긴장을 감추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장영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가해자라고 오해받아 동네 슈퍼 아줌마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억울한 마음을 꾹 누르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 장광이 자초지종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크게 장영을 혼냈다고 했다. ‘아 이 사람에게는 절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없겠구나.’ 초등학생 장영의 결심이었다.

출처 : 채널 A 아이콘택트 中

어린 장영이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잘못하고도 부모님에게 떼를 써서 잘못을 덮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억울하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영아, 어떻게 된 거니?” 물어봐주고, 믿어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부모님만큼은 나를 믿어주기를 바랐다. 사과 하나 제대로 깎지 못한다고 비난하거나 우습게 볼 사람도 없지만 설령 누군가가 ‘사과 하나도 제대로 못 깎는 한심한 사람’ 취급을 하더라도 부모님만큼은 괜찮다고, 사과를 잘 깎지 못해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어주기를 바랐다.


내가 눈치가 없어서 사과 깎는 일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놈인데도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30 중반을 향해 가는 지금도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부모님에게 얹혀사는 내 앞가림도 못하는 건 한심한 놈이 맞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 욕심이 과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억울하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사람 구실 못하는 한심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가. 그저 부모님만이라도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은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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