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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ul 20. 2016

청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장강명,『표백』,한겨레출판, 2011 #책 리뷰

청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장강명,『표백』,한겨레출판, 2011 #책 리뷰


생존만 남은 사회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바꿀 수 없는 사회가 있다. 그곳의 청년들은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가 얼마나 완벽하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고 순응할 뿐이다. 모든 고민은 '내가 적응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개인의 성공은 미덕이 되고, 저항과 반항, 유대는 미련한 것으로 치부된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장강명,『표백』, 한겨레출판, 2011p.187~188


바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바꿔야 하는 걸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먹고살기 바빠서 그냥 지나쳤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뭐, 어쩔 수 없잖아?'하는 생각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니 '개인의 성공'을 위해 매진한다. 모순과 부조리라는 물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대충 이런 상황이다


위로 올라간 사람들은 아래를 보며 노력이 부족하다 말한다. 오르지 못 한 사람들은 그들을 '노력충'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물은 계속 차오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밀고 떨어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군가 힘들다고 말이라도 할세라면 누가 더 힘든지 경쟁이 시작된다.


'힘을 합치면 물이 들어오는 구멍을 막을 수 있어요!'라는 말은 사실일지라도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발언일 뿐이다. 결국 구멍을 막아보려던 사람도 사다리를 향해 달려야만 한다.


최후의 저항, 자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가능한 것이라곤 개인의 자그마한 성공뿐이다. 어떤 주장도 이미 있었던 주장에 불과하고, 새로운 것도 사실 기존에 있던 주장을 조금 수정한 것뿐이다. 이들을 '표백'세대라 부른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세대라는 것이다. 어떤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지 않는다. 방법은 하나다. 자살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을 넘으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의 메세지를 외치는 것. (중략)

계획을 잘만 세운다면, 사악한 상상력이 따른다면, 단 몇 명의 죽음으로도 세상을 흔들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위의 책, p.18
어려울 거 없다 아주 살짝만 넘으면 된다


2014년 기준 하루 평균 37여 명이 자살한다. 1년에 13,836명이다. 하지만 유명인의 자살을 제외하면 단신으로 처리되거나 기사에 실리지조차 못한다. 사회는 본능적으로 자살을 숨긴다. 자살은 그 사회가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반증하는 증거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대, 표백 세대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연쇄적인 자살로 이 사회가 완벽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청년들의 자살 선언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자살은 공동체에 해가 된다. 자살은 그 공동체가 믿고 있는 신화에 의문을 제기해 결속을 무너뜨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살 선언을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러므로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그걸 범죄로 규정한다.
위의 책, p.173

자살이 사망원인 4위에 위치한다_ⓒ통계청「2014년 사망원인통계」


문제가 있다면 자살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결정이거나 '우울증 등의 정신병'으로 인한 결과로 취급받는다는 거다. 저항이 아니라 굴복과 좌절로 해석한다. 그래서 『표백』의 자살 선언자들은 자살을 함에 있어서 한 가지 원칙을 준수한다.


절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했을 때 자살하지 마라. 그런 때 자살하면 세상은 당신의 선언을 그저 패배자의 개인적 도피로 여길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기다리고 참았다가 당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실행하라. 이 선언이 분명한 사회적 저항임을 전달하려면 그래야 한다.
위의 책, p.160~161

과연 자살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내가 처음 책을 읽고 느꼈던 감정은


'그래서 씨X 뭐 어쩌라고. 청년들 보고 싹 다 죽으라고?'


였다.


자살이 공동체의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결속을 무너트린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이 방법이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진도 앞바다에서, 구의역에서, 강남역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게 없다. 편을 갈라 싸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제 그만 좀 하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억울한 죽음과 그들을 기억하는 자들만 고통스러워할 뿐이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건 살아있기에 가능하다. 죽음은 산 자들의 문제다. 그들의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그래서 그 몫까지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그 방법을 찾고 또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청년들만의 몫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사회 문제 해결을 전가하는 것도 모순이고 부조리다.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은 청년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청년만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청년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실에 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 이것도 일종의 착취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위의 책, p.342 작가의 말 중 일부



* 본문 중 사진 출처 : 밤놀닷컴, http://bamnol.com/ssul/352105


* 참고자료


01. 통계청, 「2014년 사망원인통계」,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2/6/2/index.board?bmode=read&aSeq=348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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