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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Aug 09. 2016

저는 '일반인 코스프레'중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민음사, 2004

저는 '일반인 코스프레'중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민음사, 2004 #책 리뷰


지난 토요일 맥주를 마셨다. 앞에 앉은 형에게 『인간 실격』을 읽고 있다고 하니 그런 책은 읽지 말라고 했다. 그건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 너무 우울하다고 했다. 나는 '그래서' 읽는다고 했다. 티격태격 하다보니 밤이 깊었고 포스기는 둘이 마신 맥주가 11,000CC라고 했다. 명백한 자기 파멸 행위였다. 멀쩡한 인간이라면 그렇게 마셨을리가 없다. 우린 '인간 실격'이었다. 남은 건 숙취와 영수증 뿐이었다. 


인간이라기에는


01.

나는 부정적이다. 긍정은 이중 부정으로 표현한다. '좋네요.'라고 말하면 될 걸 '나쁘지 않네요', '라고 말하는 식이다. 음식을 먹고 나서도 '나쁘지 않네요'라고 대답한다. 좋다거나 맛있다는 말은 왠지 낯간지럽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는 기분마저 들어서 잘 하지 않는다. 뭘 먹고 맛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별로 없다. 내게 음식은 맛이 없거나 그렇지 않을 뿐이다. (맛없다의 반의어는 '맛있다'가 아니다. 맛이 없지 않다는 것뿐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배가 고파도 그걸 느끼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사람들이

"저런, 배고프지? 우리도 그랬거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처럼 배고픈 때가 없지. 단 콩은 어때? 카스텔라도 빵도 있단다."

라는 둥 법석을 떨었기 때문에 저는 천부적인 아부 정신을 발휘해서 아아 배고파 하고 중얼거리고는, 설탕에 절인 콩을 열 알 정도 입에 집어넣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민음사, p.14


02.

나는 일반인 코스프레에 능숙하다. 아침이면 일어나 학교에도 갔고, 자습을 째기도 했고, 대학에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기도 했다. 휴학 후엔 일도 했다. 일을 잘 한다고 인센티브를 받거나 따로 식비를 챙겨주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코스프레 치고는 너무 완벽해서 뭐가 진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혼자가 되는 순간이면 본래의 나로 돌아와 우울감 속에서 헤엄쳤다. 내가 연기자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해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03.

난 누구와 친하냐는 질문에 항상 우물쭈물한다. 그러다 그냥 그 사람이 원할 것 같은 사람으로 대답해주거나 '없다'라고 한다. 누군가와 '친한 친구'로 규정되는 게 싫었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언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 관계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싫었다. 친구라는 존재에게는 더 많은 연기가 필요할 게 뻔하니깐 말이다. 내게 '관계'라는 건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그게 친구든 가족이든.  


저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했지만 '우정'이라는 것을 한번도 실감해 본 적이 없었고 (호리카처럼 놀 때만 어울리는 친구는 별도로 하고) 모든 교제는 그저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어서 그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열심히 익살을 연기하느라 오히려 기진맥진해지곤 했습니다.

위의 책, p.82


04.

(모든 사람이 두렵지만 특히) 두려운 사람들이 있다.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챌 것 같은 사람들이다. 능숙한 연기를 선보이다가도 그들 앞에만 서면 자연스러운 연기가 안 된다. 마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마술을 선보이는 느낌이랄까. 속으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가까이 하기에는 내 모습을 들킬까 두렵고, 멀리 하자니 비겁해 보인다. 참담하다. 이러니 인생이 편할리가 없다.


05.

이쯤 되면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싶겠지만 제법 잘 산다.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고통스럽다는 점만 빼면) 별 문제없다. 연락 한 번 먼저 하는 적 없지만 호의를 가져주는 사람들도 있다. 먼저 말도 걸어주고 밥도 사주고 술도 사준다.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인 걸 알면서도 덜컥 다가오는 두려움에 뒷걸음친다. 내겐 언제나 거리가 필요하고 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연기를 한다. 외로움과 불안함에 항상 우울해하면서도 말이다. 


이 아파트 사람들 전부가 나한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얼마나 모두를 무서워하는지. 무서워하면 할수록 남들은 나를 좋아해 주고, 남들이 나를 좋아해 주면 좋아해 줄수록 나는 두려워지고 모두한테서 멀어져야만 하는, 이 불행한 제 기벽을 시게코에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위의 책, p. 91 

06.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비슷한 것 같지만 '맛있다'와 '맛없지 않다'처럼 미묘한 차이가 있다. 내 삶도 마찬가지다. 난 항상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지만 다자이 오사무처럼 다섯 번의 자살시도 끝에 생을 마감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오사무의 자살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자살은 어렵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에게 남은 주저흔이 그 증거다. 죽을 용기로 살라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어렵다. 


07. 난 겁쟁이라 못 죽는다. 죽고 싶지만 죽을 용기는 없다. 나야말로 '인간 실격'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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