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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an 31. 2017

슈퍼맨은 없다

01.

'야간 자율 학습'은 말만 '자율'이었다. 강제로 앉혀두면 공부를 할 거라는 생각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가 좋았다'며 당시를 추억하는 친구들을 보면 조금 놀랍고, 한편으론 하나의 기억이 다른 감정으로 남아, 웃으며 공유할 수 없다는 게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내 경험과 기억들을 섣불리 미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과거의 기억을 추억으로 공유할 수 없다는 아쉬움보단, 당시의 불편했던 기억이 추억이 되고 관습이 되어 누군가에게 '우리 때는 더 심했어! 이거 가지고 뭘 그래. 그런 게 다 추억이지' 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02.

난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이 강하다.('빨갱이'나 '테러리스트'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아나키즘'의 핵심은 지배와 권력에 대한 부정이다.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지만 정부가 권위/권력적이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보단 '탈권위주의', '비권력주의' 정도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같은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계급 혁명으로 새로운 사회를 세우겠다는 사회주의의 주장과는 엄연히 다르다.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도 자본가가 차지했던 기득권의 자리를 노동자가 차지할 뿐이다. 주인만 바뀔 뿐 기득권은 여전히 존재한다. 난 그래서 궁극적으론 여당도 야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03.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려면


1)40세 이상이면서, 2)기탁금 3억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감수할 수 있고, 3)막대한 선거 비용을 어떤 방식으로든 충당할 수 있는 사람


이어야 한다.


이 조건을 다 충족하는 서민은 없다. 당선을 겨뤄볼 만한 후보라면 어차피 기득권이란 의미다. 이 분들은 몇 백 원이라도 저렴하게 사려고 최저가 사이트를 찾아 온갖 쿠폰을 적용해서 결제하고 나서도 몇 백 원 더 싼 곳을 보면 울화통이 터지는 나랑은 다르다. 득표율에 따라 돌려받긴 하지만 최소 3억을 국가에 맡겨둘 여유가 있는 분들이다. 물론 본인이 가진 기득권마저 포기하겠다는 각오로 대통령 후보로 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겠지만 그 뜻을 피긴 어려울 거다.


04.

투표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시민의식은 흙이다. 아무리 좋은 꽃이라도 마른 흙 위에선 금방 시들고 만다. 당선된 후보가 뜻을 펼치려면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우선 되어야 한다. 봉투값을 달라고 했단 이유로 알바생을 흉기로 찌르고, 신입생에게 억지로 술 먹이는 걸 '문화'라며 강요하고, 성희롱 발언을 해놓고 '왜 이렇게 예민하냐'라고 말하는 사회에선 불가능하다. '이번에 XX 뽑았는데 왜 바뀌는 게 하나 없어? 역시 정치인들은 다 똑같아!'라고 말하기 전에 알바생에게 반말을 한 적 없는지, 나이 혹은 직위를 무기로 부당한 강요를 한 적 없는지, 무심코 했던 말이 성희롱은 아니었을지 자기반성부터 해야 한다.


05.

슈퍼맨은 없다. 영웅이 짠 하고 나타나서 모든 걸 해결해주는 건 영화 속에서나,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훌륭한 대통령이 당선된다 해도 하루아침에 좋은 세상이 되진 않는다. 알다시피 권력이 선을 위할 땐 느리고 비효율적이지만 악을 향할 땐 빠르고 효율적이다. 그 방향을 결정하는 건 국민, 그러니깐 우리 모두의 몫이다.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고, 침묵한다면 권력의 부패에 동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 민주적인 사회를 바란다면 내 삶에서부터 권력과 권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슈퍼맨 혼자서 내 삶을, 이 사회를 바꿔줄 수 없다. 이제는 인정하자. 그리고 투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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