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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Mar 20. 2020

3월 셋째 주 독서정리

3월 셋째 주 독서정리


1. 금정연X정지돈, 『문학의 기쁨』, 루페, 2017


<때로는 형태가 내용을 좌우한다>

책 속에서 금정연은 '형태의 안을 바꾸고 채워 넣어 봐야 도긴개긴이다. 중요한 건 형태를 바꾸는 일이다. (중략) 어떤 내용의 소설을 쓰느냐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것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p.158~159) 라고 말한다. 실제 소설의 형태를 바꾸려 한 소설들이 있다. 박민규도 그랬고, 정지돈도 그랬다.


나는 정지돈의 소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눈은 스토리나 인물, 문장을 쫓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주체적으로 텍스트를 읽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가깝다. 나의 독법은 경직되어 있었고, 뇌는 관성적으로, 기계적으로 작동하며 정답이나 모범을 찾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고 있었다. 낯선 형식 앞에선 '이건 내가 이해할 수 없어. 어려운 소설이야'라고 반응하는 게 그 반증이다. 열린 마음으로 텍스트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정지돈의 소설은 난해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낯섦 앞에서 '난해한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난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음'에 대한 변명에 가깝다. 난해 함이라는 단어는 소설 자체가 가진 성격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텍스트를 난해하다고 '느낀' 주체는 결국'나'다. 그러니 '난해한 소설이다'보단 '나는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책임 있는 문장일 것이다. 


그럼에도 무책임을 감수한다면 『문학의 기쁨』 또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소설이 서사를 전달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이 책 또한 둘의 대담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 주제와 인용이 그렇고, 노이즈로써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를 담론 안에 끌어 들어오는 등의 형식 또한 그렇다. 중요한 키워드가 등장해야 할 때마다 절묘하게 그 자리를 가려버리는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p.47)이나, '"보도자료가 우리의 대담을 예상 표절했다"는 반응을 보였다(p.57 각주)'와 같은 문장에서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책을 보다가 웃다니. 씹던 밥알이 식탁에 튀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 개방성

2. 더 많은 공부

가 필요하다.


2. 조영일, 『직업으로서의 문학』, 도서출판b, 조영일


<안정(A)과 반동(B)>

내가 하(려)는 일들의 매력을 자유로움에서 찾았다글을 쓰거나 음악을 만드는 것. 그렇게 말하면 모두들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묻는다. 그러게. 뭐 먹고살지. 둘 다 돈은 안 될 거 같은데. 그럼에도 먹고사는 문제에 지배당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자유. 그게 핵심이므로 돈에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안 된다. 근본을 잡아먹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애초부터 이 일로 이윤을 추구하겠다고 접근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라는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기만이었다. 나는 건너는 신호등, 지하철 타는 번호마저 정해놓을 정도로 변화를 싫어한다. 나는 안정(A)을 꿈꾼다. 추운 것도 싫고 시끄러운 것도 싫다. 잔소리나 간섭은 더더더 싫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평생 책만 읽고 영화만 보라고 해도 크게 불만이 없다. 아주 가끔 나가서 맥주나 한 잔 마시고 주말에는 합주를 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눈만 뜨면 자본을 욕하면서 돈에 대한 불안이 심하고, 소비욕도 강하다. 고정적인 수입이나, 일정 정도의 통장 잔고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그 불안은 모든 시도에 앞서 '실패하면 어쩌지?' '지금보다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지?' 따위의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고, 결국 모든 시도는 시도조차 하지 못한 상태, 무위로 돌아갔다.


이렇게 도태되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진다. 도태라니. 도태라 하면 대체 무엇으로부터의 도태인가. 문학계는 항상 문학계에 대한 비판이 있을 때마다 '권력'이나 '이너서클' 따위는 없다고 주장해왔다. 음악시장도 권력이나 사재기 따위는 없다고 했고.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의 눈치를 보고 있는 셈이다. 


과연 그런가? 장강명은 『당선, 합격, 계급』을 통해 문학상과 공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요약하자면 '과거제도는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을 막았'고,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시험만 잘 치면 순식간에 기득권 핵심부에 들어설 수 있다는 약속'에 빠져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시스템에 대한 반동(B)을 입에 담기를 즐겼다. 


더러운 자본! 

개혁하라 시스템! 


하지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안정(A)에 대한 욕구는 등단이든 추천이든 미디어의 노출이든 아무튼, 어떤 방식으로든 이너서클 안으로 진입해 고정적인 수익과 지면(혹은 무대)을 보장받기를 갈망했다. 자본에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 말들을 그럴듯하게 지껄이고선 책임을 다 했다 여기는 방식으로 '그 질서의 가장 열렬한 수호자(p.101)'가 되어 있었다.


'작가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면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올까?(p.85)'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해보자.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A)된 삶을 살게 된다면 내 글 혹은 내 음악이 정말 나아질까? 지금까지도 진심을 담지 못해놓고? 분명 내가 하(려)는 일들의 매력을 상업성과의 거리, 즉 반동(B)에서 찾았다고 말해놓고 안락함에 중독되어 안온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자본을 타파하라!' 같은 안온한 말을 반복하며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았나. 자본을 타파하기 위해 뭘 했나? 보여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럼 반동(B)에 대한 반동(B`)을 안정(A)으로 치환할 수 있는가? 나의 성향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건 핑계다. 합리화다. 


얼마 전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 사태가 있었다. 문학사상사가 이상문학상을 출간하면서 수상자들의 저작권을 3년간 양도받고, 개인 작품집의 표제작으로도 낼 수 없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김금희, 최은영, 이기호 작가는 수상을 거부했고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던 윤이형 작가는 작품 활동을 "영구히 중단"하는 절필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제가 무엇에 일조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부조리에, 범죄에, 권리 침해에 일조하고 싶지 않다”며 “저는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할 수 없습니다. 일하지 않는 것이 제 작품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를 그만둡니다”라고 밝혔다.


내가 읽었던 어떤 작품보다 더 '문학적'이었던 장면이다. "일하지 않는 것이 제 작품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윤이형 작가의 말을 떠올린다. 


나는 너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과 함께 굴러가는야 하는 삶이 혐오스럽다. 조금 느리게 걷는 방식으로 반동(B)을 꾀하려 한다. 그럼에도 나는 매 순간 가난의 공포 앞에서 떤다. 과연 나는 앞선 사건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작품을 지키기 위해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지금도 한 발 디뎠다가 삶이 와르르 무너지기라도 할까 봐 무서운데. 그렇다고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도 못하면서. 후. 내가 부지런히 손가락질해 마지않던 기득권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하나 없다. 더러운.


그럼에도 난 가난하고 싶지 않다. 가난은 항상 불행에 한 발을 디디고 서 있다. 그건 단순히 돈이 없어서, 소비를 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가난은 사람과의 관계를 납작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관계 앞에서 시간과 돈을 따지다 보면 가장 먼저 외면하고 억업하게 되는 게 자신의 진심이다. 진실한 관계, 기꺼이 주고 기꺼이 받을 수 있는 관계. 그런 마음가짐을 가능케 하는 건 돈, 아니 마음의 여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깐. 그러니깐 돈이 주는 건 행복이 아니라 여유다. 돈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처럼 여겨지는 건 우리에게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우리가 아니라 나다. 여기서도 나의 이야기를 슬쩍 우리의 이야기로 바꿔 말하며 진심을 감추려 했음이 드러났다. 이걸 지우는 것은 회피에 불과하기에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조영일은 '향간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원한' 내지 '음모'로 치부'된다고 말하면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조용히 있는 쪽을 택'하는 문학인들이 '괜히 나섰다간 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바뀔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비판을 받아도 그들과 그들의 문예지는 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문학인들 '문학적 상상력이란 이럴 때에 발휘하라고 있는 것(p.124) '이라며 따끔한 비판을 날렸다.


다행히도 문학인들은 이상문학상 사태에서 문학이 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과연 내 삶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안정(A)으로의 반동(B`)

아니면 반동(B)으로의 한 발


아무튼 발을 떼지 않으면,

흔들림을 감수하지 않으면 변하는 아무것도 없다.


3. 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수치심 권하는 사회』, 가나출판사, 2019


<베스트셀러는 피하자>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에 속지 말라. 수치심은 '모순되고 이해가 상충하는 사회공동체적 기대(p.44)'에서 온다. 를 길게 늘여 쓴 느낌.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나 책으로써는 그닥.


4. Steven C. Hayes, Spencer Smith 지음, 민병배, 문현미 옮김,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학지사, 2010


<내가 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은 언어를 쓴다. 언어를 쓰기 때문에 언어에 갇힌다. 예를 들어 빨간 버스를 생각하지 말라. 는 말을 들으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빨간 버스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웠던 순간을 떠올리고 반추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더욱 강렬해진다. 심지어 '감정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생각을 억제하면 결국 감정이 생각을 유발하여, 억제 전략은 생각과 감정을 모두 유발하게 된다.(p.77)'고 한다. 생각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거다. 빌어먹을.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고 생각에 낚여들지 않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세를 변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건강관리를 도모(p.120)'하는 것이다. '생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보도록(p.169)'하는 방식인데, 이를 '인지적 탈융합 기법'이라고 한다. 전쟁터의 전사가 되어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떠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내 마음이 떠난다 해도 전쟁은 지속되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이미 전쟁터에서 떠났는데. 전쟁이 끝난 후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음. 전쟁이 났구나. 피할 수 없구나. 기꺼이 경험해야겠구나.


그럼에도 표지 디자인과 폰트는 구매를 망설이게 했다. 한마디로 구렸다. 번역도 다소 거슬리는 부분이 있고, 제목도 내용을 파악하기 전에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내가 심리학을 한 건, 이 책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라는 알라딘 평(airmoo님)이 없었다면 아마도 구매하지 않았을 듯. 


읽는다기보단 지시에 따라 써보고, 실천해봐야 하는 책이지만 아무튼 이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기꺼이 경험하자. 생각에 갇혀 회피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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