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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ul 24. 2020

꼭꼭 씹어먹으라는 어른 말씀

구독경제는 많이 볼수록 합리적 소비라는 믿음을 자극한다

  동백이가 힙했던 시절이었어. 다른 사람들은 다 봤는데 나만 소외되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래서 결신했지. 이번 주말에 정주행하자. 근데 다운받아서 보면 한 편에 1,650원이더라고. 거의 스무 편인데 다 내려받아서 본다고 생각해봐. 어휴. 3만원이 넘잖아. 솔직히 부담되더라고. 그 돈이면 국물 떡볶이에 튀김 포장해서 캔맥주까지 마실수 있는 돈인데. 그래서 좀 저렴하게 볼 방법 없나 찾아봤지. 정액권이 있더라고? 그래. 맞아. 어차피 다운받아도 다시 안 보잖아. 괜히 용량만 차지하고. 스트리밍으로 보는 게 낫겠다 싶었지. 귀찮게 받아서 옮길 필요도 없고. 출퇴근길 어차피 사라지는 시간 알차게 쓰는 거지.

  홈페이지를 쭉 보니깐 군침이 흐르더라고. 이것도 보고 싶었던 건데. 여기서 영화랑 다큐멘터리도 서비스하는구나. 눈이 돌아갔어. 다운받으려다 비싸서 영화관에서 보는 게 낫지 하고 안 봤던 건데 이게 한 달 구독료만 내면 무제한이라니. 빨리 보고 이것도 봐야겠다. 술 한 번만 덜 마셔도 충분히 세이브 되는 돈이잖아. 집에 있으니 돈도 안 들고 교양도 쌓고. 일석이조잖아. 열 편만 봐도 다운받았다고 치면 얼마야. 정액권으로 보는 게 무조건 이득이잖아. 열 한 편부터는 돈 버는 거네 돈 버는 거야.

  처음엔 신나서 봤어. 하루에 세네편씩 몰아봤지. 시간 가는줄도 몰랐어. 주말만에 10회를 돌파했어. 근데 사람들에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드라마를 보는 게 쉽지 않더라. 그래 집에 가서 큰 화면으로 봐야지. 집 가서 씻고 개운하게 보는 거야. 그렇게 결심했지. 근데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하면 한 것도 없는데 잘 시간이더라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다보니 접속할 시간이 없더라. 다시 주말이 오면 꾸역꾸역 정주행을 했어. 일을 하는 것처럼 말이야. 켜놓고 다른 일을 하기도 했어. 아 오늘은 세편 봤다. 할당량을 정해놓고 말이야. 그렇게 다음 정산일이 다가왔어. 다이어리에도 적어뒀지. 해지할까 하다가 에이. 한 달만 더 보자 하고 냅뒀어. 손해는 아니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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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몇 달이 지났어. 정액권을 결제했다는것도 까먹고 있었지. 다른 일 때문에 문자 내역을 찾아보다가 쓴 적 없는 돈이 결제되어 있길래 깜짝 놀랐어. 처음엔 해킹당한 줄 알았어. 과거의 내가 정액권을 구매했다는 걸. 누굴 탓하겠어. 내가 꾸준히 드라마를 볼 거라고 믿은 나를 탓해야지. 합리적 소비? 그건 불가능해. 진짜 합리적인 소비를 하려면 내가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야 해. 한 달에 스무 편씩 보던 사람이면 정액권이 이득이겠지. 근데 그렇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많이 보게 되는 건 쉽지 않더라고.

  구독경제는 뷔페 같은 거였어. 들어거기 전까지는 왕창 먹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게 먹고는 배가불러 젓가락을 내려놓게 되는. 내가 합리적 소비자라는 믿음을 버리는 게 합리적 소비를 위한 첫 걸음이야. 큰 돈은 아니었지만 내 어리석음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쓰려. 나는 하나를 보더라도 꼼꼼히 보고 다시 보면서 놓친 부분을 다시 읽는 게 좋은 사람이었는데 말야. 효율성에 눈이 멀었던 거지. 이젠 조금 비싸더라도 내 속도에 맞춰 꼭꼭 씹어먹으려고. 어차피 한 번에 많이 못 먹더라고. 혹시 너는 비슷한 경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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