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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Aug 08. 2020

노동이 머문 자리

  점심으로 라멘을 먹고 카페에서 복숭아 아이스티를 한 잔 주문했다. 집에 와서는 택배로 주문한 쿨샴푸를 뜯어서 화장실에 가져다놓았다. 직접 만들지 않고도 음식점에서 라멘을 먹고, 아이스티를 마시고, 장을 보지 않고도 집에서 생필품을 받아볼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의 노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든 우리의 삶은 서로의 노동에 의지하며 유지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지고 있다. 물류창고에서 대규모 감염 우려로 인한 방역당국의 검진 과정에서 보았듯 기업의 규모와 관계없이 가장 열악하고 위험한 자리에는 불안정한 위치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계 때문에 자신의 꿈이나 전공과는 다른 직업을 갖게 된다. 가이스탠딩이 제시한 ‘프레카리아트’라는 정의에 따르면 ‘자신이 바라는 경력이나 정체성을 쌓는 데 도움이 안 되는 불안정한 형태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든 프레카리아트’이다. 이 불안정 노동은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형태만으로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받는 차별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노동의 불안정화가 고용 형태를 넘어 확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 혹은 기계에 대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노동자 간의 무한 경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경쟁을 통한 부와 지위의 획득은 사회 구조의 모순을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모든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별은 차이라는 말로 대체되고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은 사회의 신념이 된다. 불안정한 일자리는 더 나은 일자리,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잠시 들렀다 가는 것으로 인식된다.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노동자들은 노력하지 않아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편견으로 확대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고용률은 점점 상승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35%를 넘어섰다. 생존하기 위해 끝없이 경쟁하겠지만 노동자 10명 중 3명 이상은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불안은 삶을 좀먹는다. 경제적 불안정이 많은 영향을 주는 한국 사회에서는, 다른 누군가가 경쟁을 거치지 않고 정규직이 되는 것 자체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로 인식된다. 공정성과 직무 관련성에 관한 우려는 마땅히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일 노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동일 노동을 수행하고 있던 노동자가 있다면 그 노동은 존중되어야 한다. 시험과 면접은 업무를 수행능력이 있는지 평가하기 위한 것이지, 시험에서 떨어졌거나 시험을 거치지 않은 사람과의 계층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무의식적으로 일자리를 구분해왔다. 존경받을만한 일자리와 그렇지 않은 일자리로 말이다. 육체 노동이나 서비스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쉽게 할 수 있는 일,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여겼다. 우리의 삶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삶을 유지해 주고 있음에도 그 노동과는 거리를 두고 그들과 다른 사람이 되어야 ‘성공’하는 거라는 인식을 내면화해왔다. 


  노동자들에 대한 존중 없는 존경은 환상에 불과하다. 노동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어떤 종류의 일이든 말이다. 실제로 다른 직업을 갖기 위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일자리라 해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고개를 숙인다. 물질과 재화의 교환을 넘어 서로의 노동에 감사를 표한다. 그렇게 서로의 노고에 감사하며 노동의 자리가 온기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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