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5파6, 『여중생 A』, 비아북, 2017 리뷰
아버지와 어머니, 두 명 정도의 자녀가 퇴근 혹은 하교 후 함께 식사를 하며 일상을 공유한다.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가족의 모습이다. 광고나 게임 등에서 다루는 가족의 모습은 정상가족의 모습을 공고히 한다. 다른 형태의 삶도 분명 존재하나 교묘히 은폐된다. 은연중에 모두가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가족의 형태를 떠올리고, 다들 그렇게 살아갈 거라고 예상토록 한다. 이런 정상 가족에서 이성애자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의 혼인, 경제적 안정은 기본 값이다. 그 안에 다툼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장미래가 자신의 삶과 너무나 괴리되어 있는 가족 구성원이 등장하는 게임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게임은 장미래 자신의 삶이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을 것이므로 말이다.
상황이 만든 학습된 무력감
‘원더링 월드’에는 장미래를 비롯한 다양한 유저들이 자신의 실제 모습과는 다른 페르소나를 가진 채로 활동한다. 미래에게는 그 세상만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현실의 사건들은 흑백으로 그려지는 반면 게임 속은 다채로운 색상들로 칠해져 있음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미래는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 속에서 보낸다. 부의 폭력과 경제적 불안정이라는 현실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비해 게임 세계는 노력과 보상이 뚜렷하다. 사냥을 하면 경험치가 오르고, 레벨이 오른다. 비교적 저렴한 돈으로 캐릭터의 옷을 살 수 있고 칭찬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던 보상을 게임 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미래는 캐시템 패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표현한다. 하지만 게임을 끄면 현실로 돌아온다. 폭력을 행사하는 부는 여전히 존재하며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도 변함이 없다. 미래는 부정적인 사건이나 자신의 잘못을 끊없이 반추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삶이 나아질 수 없다는 생각 또한 견고하다. 그 중심에는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강렬히 자리 잡고 있다. 유년기 보호자가 자신을 떠났다가도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안정적인 애착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부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간 어머니는 미래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미래에게 불안정한 애착관계를 자리 잡게 하는 계기가 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불안을 느낀다. 원더링월드가 서비스를 종료 또한 ‘항상 함께하겠다’는 말이 수사에 불과하다는 신념을 재확인하게 되는 사건으로 작용한다.
미래는 관계의 진전 가능성이 보이면 상황을 회피해버린다. 지금 있는 관계도 과분하다고 여긴다.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맺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에 부적절한 관계로 이어지는 모습도 보인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친구들이 자신을 떠날 거라는 신념에 의해 남에게 맞추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렇게 미래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지 않는다. 속으로는 친밀한 관계를 원하면서도 상대가 나보다 높은 급의 사람이라는 생각에 친밀함에 대한 욕구를 포기해버린다. 관계에서의 반복적인 좌절은 다시 자존감을 낮추는 부정적 악순환이 된다. 또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게 불가능하다는 가치관이 굳어지며 무력감으로 빠지는 것이다.
무력감과 좌절이 지속되면 삶의 희망을 잃게 된다. 살아야 한다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내적 에너지를 상실한다. 미래는 부의 폭력과 폭언으로 인해 자신의 삶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부적절감을 느낀다. 생일은 축하할 날이 되지 못한다. 생리대를 사기 위한 돈이 없어 지갑을 뒤지다 폭언을 들을 뿐이다. 희망이 없는 삶에선 모든 순간이 고통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출생 자체를 문제로 여긴다. 미래는 우울증으로 의심되는 증상을 많이 보인다. 그 중 하나가 자살을 암시하는 텍스트에 과한 관심을 보이거나 자살을 자주 언급하는 것이다. 미래는 인간의 실존에 관련된 책을 읽고 블로그에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듯 한 글을 쓰기도 한다. 즐거웠던 시간들이 분명 있었음에도 반복되는 부의 폭력과 경제적 불안으로 인해 불행이 현실이며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단념해버린다.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도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의지를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은 자기효능감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 요인 중 가장 핵심적인 사람은 바로 아빠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 물리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한 미래는 아버지의 잘못된 행동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반복되는 폭언과 폭력은 미래에게 반복적인 상처를 준다. 그런 미래가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식으로써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이라며 자신이 사이코(정신이상자)가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나 그 감정을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공유함으로써 스스로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펑펑 울기도 한다. 그러다 사고로 아빠가 죽고 어머니와의 일상은 조금씩 안정을 찾는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미래에게 삶은 조금씩 변한다.
성취감을 느끼는 작은 일부터
미래의 삶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게임 속 퀘스트처럼 인식하는 것은 무력감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보상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학급에서 ‘앞뒤에 앉은 친구에게 말을 걸어보기’ 같은 목표를 자신에게 부여하고, 그 일을 성취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고 비정상이라는 잘못된 신념도 조금씩 깨 나간다. 자신이 좋아하던 글을 써서 돈을 벌게 된 것이 부정적인 신념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깨고 나가는 망치가 되어주었다. 그 돈은 평소 고마움을 느끼던 재희에게 신발을 사줄 수 있게 했고, 엄마의 심부름을 하며 딸기를 사갈 수 있게 했다. 자그마한 선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은 돈에 제한되어 납작해져 있던 미래의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낸다.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부적절감을 조금씩 잊게 해준다. 미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정상이나 주류로 여겨지는 문화에서 한 발 벗어나 있는 인물들이다. 현재희는 부모의 이혼으로 학교를 자퇴한 채 누나와 집을 나와 산다. 누군가에게 버려져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항상 맞춰주기 위해 노력했던 삶을 공유하며 미래와 재희는 위로를 받는다. 또한 인디밴드 음악이나 서브 장르의 애니매이션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 관심사를 공유하는 경험을 한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억지로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온 취향을 공유하고 싶다는 동기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친구들과 같은 학교를 가고 싶다는 생각 또한 학업과 삶의 동기가 된다. 스스로 공부 하고, 공부한 내용이 시험에 나오고 점수가 오르는 경험은 '할 수 있다'는 생각과 가치 실현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내적 에너지를 조금씩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래는 실패에도 유연해진다. 자신을 싫어하는 장노란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라는 사람의 가치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탄탄한 신뢰를 쌓은 관계들이 바탕이 되자 상황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게 된다. 이를 기반으로 회복력과 탄력성을 되찾는다.
안정적인 관계를 믿지 못하던 미래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결혼을 하겠냐고 말한다.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어머니가 맞는 걸 지켜보기만 한 무력감과 죄책감이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다. 재희 또한 부모님의 이혼과 친구들의 배신과 괴롭힘으로 사람을 사귀는 걸 어려워한다. 여자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도 여긴다. 하지만 이 둘은 천천히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해나간다. 물론 ‘결혼’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아직 주저하지만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고통으로 가득했던 삶이지만 행복과 즐거움, 사랑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안정한 애착이 잘못된 신념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삶에 대한 통제감, 효능감을 되찾다보면 어느새 무력감은 사라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