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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Oct 19. 2019

나는 왜 문학에 관심을 갖는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세상의 속도에 맞춰 떽데구르르 굴러야만 했다. 그 사실은 교복을 입기 전부터 너무나 자명하게 다가왔다.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매일 집을 나섰다 때가 되면 돌아왔는데, 그들은 하루 종일 세상에 맞춰 구르느라 온 세상에 널린 피곤과 우울과 좌절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히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감정은 세탁기에 넣어도 쉽게 빠져나가지 않아 나에게도 얼룩을 남겼다. 미래에 존재할 나의 삶이 너무나 두려웠다. 아아. 어른은 죄인이구나. 나도 어른이 되면 같은 벌을 받겠지. 그런 생각이 내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른들은 자기보다 작은 존재를 보면 “너는 커서 뭐 할 거니?”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게는 “이야, 너도 곧 굴러야 돼. 넌 어떻게 구를 거니? 좌로? 우로? 요즘엔 앞구르기가 잘 먹힌다는데 너도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처럼 들렸다. 양복을 입고 구르던, 작업복을 입고 구르던. 소리를 지르며 구르던. 하루 종일 떽데구르르 구른다는 건 똑같아 보이는데 왜 자꾸 묻는 건지. 나에게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지.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문학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문학을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너는 무엇을 할 거니?’라는 질문에 서로가 적당히 만족해 물러날 수 있을 만큼의 답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저 그런 대답을 내놓았을 때 허공에 흩어지고 말 조언들을 듣는 시간이 이어지기 마련이었는데, 정말이지 그런 꼴은 딱 질색이었다. 다행히도 문학은 어색하거나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상투적으로 이어지는 질문을 어느 정도 봉쇄할 수 있는 답변이 되어 주었다. 물론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아아. 무... 문학? 책 좋지. 나도 어렸을 때 책 많이 읽었는데. 열심히 하렴. 멋있네. 근데 그거 돈 안 되지 않니...?


   내게 문학이란 세상을 위해 너무 열심히 살지 않을 거라는 다짐 같은 것이었다. 문학을 하고 싶다는 말은 너의 쓸모가 무엇이냐는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고,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에서 나의 쓸모를 입증하려면 경쟁도 미덕이 된다는 걸 너무나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를 빼놓고 사람들이 “오늘은 두 바퀴나 굴렀어!”, “오늘은 뒤돌려차기를 하면서 굴렀어!” 같은 말을 보람찬 얼굴로 할 때면 와 이거 나 혼자 잘못된 객기를 부리고 있는 거 아닌가. 사실 나는 오누이를 괴롭혔다 썩은 동아줄을 잡고 낙오되는 호랑이가 아닌가 하는 공포에 시달렸다. 그 공포는 아이러니하게도 나 혼자 구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써먹을 데가 없다는 문학의 무용성이 문학의 존재 이유며 존재 방식이라는 것, 유용한 것은 유용성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는 김현의 말을 되새겼다. 그러니 존재의 쓸모를 증명하지 않는 건 내 삶이 유용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며, 유용한 것만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타인을 억압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먹고살기 위해 누군가를 아프게 하거나, 상처 주는 일은 되도록 피해 가고 싶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이상에 가깝다. 나 또한 사회 속에 살아가는지라 누군가에게 빚을 지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때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쓸모가 있는지 입증해야 하는 날도 있다. 어쨌든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고 내 입으로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난 지금까지 나는 나의 쓸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거나 대답해 본 적이 없다. 나의 문학에 대한 욕구 또한 내 안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떽데구르르 굴러가는 세상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글자가 아니라 문학을 읽기 시작한 건 이미 학부 수업의 절반을 들었을 때. 그니깐 스물둘 이후부터였다. 당시 나는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최초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왔다. 현대문학 시험에 작품 제목과 작가 이름을 맞추는 문제가 나왔는데 딱 세 명의 이름밖에 쓰지 못했던 거다. 박민규랑 신경숙, 그리고 내 이름. 교수님 이름도 까먹어서 못 썼다.      


   시스템에 복무하고 싶지 않다는 거친 목표는 있었지만 그 시스템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 외부에서 시작된 문학에 대한 욕구는 결정적인 순간 나의 모순을 드러냈다. 실천은 결여되었고 반성은 수사 뒤에 능숙하게 숨었다. 무언가를 노리는 듯 혀를 날름대고 있었지만 사실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타인을 읽어나가겠다는 다짐은 허구일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글은 누구도 설득할 수 없고, 감응시킬 수 없다. 그걸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나니 이십 대는 저물고 있었다. 이런, 그 시간 동안 떽데구르르 구르기라도 했으면 돈이라도 모았을 텐데. 최저임금으로만 따져도 얼마야.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그럼에도 문학을 놓지 못한다. 과도한 긍정성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경험했고, 여전히 그런 세상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구체화되지 못했던 건 추상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나의 문장과 사고는 더 이상 날카로워지지 못한 채 녹슬고 있었다. 나의 말은 어디선가 들어본 말, 하나 마나 한 말이 되어갔다. 그렇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지만 문학의 곁을 벗어나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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