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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ul 24. 2021

알코올 중독자의 금주선언

심리상담을 받다 보니#1


알코올 중독자의 금주 선언

심리상담을 받다 보니 #1


심리상담을 받기 전 심리상담에 대한 편견이 몇 개 있었습니다. 


1. 심리상담을 받아서 생각이 바뀐다 해도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므로 자기 위안 이상의 효과는 없을 것이다.

2. 나와 잘 맞는 상담사 선생님을 만나기는 힘들 것이므로 상담을 받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3. 심리상담은 돈벌이 수단일 것이다.


이 질문들이 사실인지 확인도 하고 심리상담을 받으며 느끼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심리상담을 받다 보니>를 쓰기 시작합니다.




심리상담을 받던 도중 선생님께서 제게도 중독 성향이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생각하는 찰나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거나하게 취해 군복을 입은 채 홍대 길거리에 누워 별을 셌던 밤

술에 취해 허허벌판 버스 종점에 내려 걸어오다 대리기사님들 사이에 껴서 간신히 집에 돌아온 날

정신 차려보니 출근시간은 까마득히 지났고 기억도, 지갑도, 핸드폰도 없어 반쯤 울면서 출근을 했던 지난날들이 


퍼뜩 지나갔습니다. 


최근에도 고삐가 풀려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술을 마셨던 게 떠올라. 아, 이거 중독일 수도 있겠다 싶어 졌습니다.


선생님 : 알콜릭의 특징이에요. 평소에는 사람 좋다가 술을 마시면 확 변하는 거. 평소에 긴장되고 허전한 마음을 건강한 방법으로 풀어보지 못한 거예요. 당신은 글을 쓰고 산책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런 것처럼요. 아들이라는 존재에게도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잘 못할 정도로 패턴화 된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 중독 증상이 있을 수 있어요.

나 : (!) 사실 맞아요. 다음 날 출근이 9시인데 3시, 4시까지 술 먹고 출근하고, 그날 쉬고 다음 날 또 먹고 그러기도 했어요. 몇 년 정도는 그랬던 거 같아요. 힘들 때 게임도 엄청 했어요. 10시간 넘게 한 적도 있고, 퇴근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또 출근하는 게 아까워서 새벽까지 게임하고 그랬어요.

선생님 : 알콜릭은 단주라고 표현하거든요. 20년 술을 마시던 사람이 30년 술을 안 마셨다고 해결이 된 게 아니에요. 참고 있는 거예요. 중독이라는 건 뇌에 손상이 온 거예요. 물론 살다 보면 딱 한 잔 마시고 싶은 유혹이 들 때가 있거든요. 적당히 마시면 괜찮아요. 근데 한 잔 마셨더니 더 마시고 싶고, 절제가 안 돼요. 그럼 그건 중독인 거예요.

나 : 맞아요. 저 최근에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요. 대신 한 번 마시면 끝까지 마셔요.

선생님 : 되도록이면 안 마시겠다 생각하시는 게 좋아요.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_1주차> 중 일부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다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오시면 폭력적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께서는 '알콜릭이셨네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간명하게 이야기하시는 걸 보고 뒤늦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신다고 생각했지 그걸 중독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으니깐요. 외부에서 봤다면 너무나 간명한 사실이었던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며칠 뒤 서점에서 『우리가 술에 빠지는 이유』라는 책을 하나 샀습니다. 책을 펼치면서도 '나는 요즘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술을 마실까 말까니깐. 나 같은 사람을 중독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책에 따르면 그것도 중독의 한 유형이었습니다. 술을 한 번에 많이 마시고 끊기를 반복하는 폭음형이라는 거죠.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래? 그럼 조절을 하면 되겠다. 한 번에 끊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이렇게 생각했죠. 그랬더니 그거 또한 알코올 중독자들의 흔한 패턴이랍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런 식이면 세상에 알코올 중독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 반발감만 들더군요.


하지만 책이 말하는 내용들이 모두 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자가 진단을 해봐도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 있었죠. 제가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것은 '나는 절대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라고 다짐을 수도 없이 반복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폭력과 폭언을 행사했고, 가족들은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라고 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같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던 거죠.


술이 아니라 사람(랑)을 갈망하고 있었

단주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 건 미리 약속을 잡아뒀던 사람들에게 술을 못 마시게 되었다고 양해를 구하는 거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하고, 불쾌해졌습니다. 내가 술을 안 마신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그래 봐야 안 바뀐다고 쇼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내가 재미없어졌다고 더 이상 안 만나주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술을 마셔야 하는 일도 생길 텐데 이럴 때도 안 먹는다고 할 수 있을까. 나만 빼고 사람들끼리 친해지고, 술자리에서 중요한 말이 오고 가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그 불안은 막연했지만 강렬했습니다. 갑자기 내 인생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죠. 친한 사람들이 다 멀어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해도 외톨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깨달은 건, 제가 정말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신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거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저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정말 술이 좋았다면 혼자서도 마셨겠죠. 

2.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는 술 약속을 잡곤 했습니다. 맨 정신으로는 어색해서 말을 못 하니깐요.

3. 술자리에는 기꺼이 가면서도 돌아오는 길에는 외로움과 공허를 느끼곤 했습니다.


제가 채우고자 했던 건 술이 아니라 관계였던 겁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고 싶은데 그걸 어떻게 하는지 잘 몰랐던 겁니다. 갈등 상황을 감당할 힘이 없고, 나의 부족한 모습, 우울한 모습, 불완전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용기가 없으니 술을 마시고 실수한 척, 혹은 신이 난 척하면서 그 모습만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겁니다. 결국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했으니 돌아오는 길은 항상 외로울 수밖에요.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능력이 약한 사람들이 중독자가 되고는 한다.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감정을 조절하는 데도 문제를 겪는다. 관계가 어긋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번뇌와 슬픔과 분노와 불안이 그들을 괴롭힌다. 그래서 술이라는 강력한 물질에 의존해 마음을 다스린다.

하종은, 『왜 우리는 술에 빠지는 걸까』, 소울메이트, 2014, p.192


술이 해결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술을 마시면 스트레스가 풀릴 때도 있습니다. 힘들었던 날 한 잔의 술은 긴장을 풀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술은 제 인생에 어떤 문제도 해결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아침이면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이번 달도 술값이랑 택시비가 너무 많이 나왔구나. 후회와 자책만 했을 뿐입니다. 물론 이유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죠. 


"좋은 글을 쓰고 싶은데 자의식이 뚝뚝 묻어나는 글만 쓰게 돼. 내 글이 너무 구려서 술을 마셨어."

"음악을 배우고 있는데 재능이랑 실력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 자꾸만 비교하게 돼. 힘들어서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어. "


정말 변화하고자 한다면 내가 '힘들다'라고 느끼는 그 감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알면서도 그 행동을 할 수 없다면 내가 가진 어떤 문제가 그것을 방해하는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지만 힘들다는 추상적인 감정에 압도되어 감정을 마비시키기 위해 술을 마셨던 겁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글자라도 읽고, 쓰고, 음악을 곡이라도 듣고, 마디라도 써보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게 싫으니 자꾸만 회피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나는 없다'는 학습된 무기력이 있었습니다. 나는 없다, 나는 가치가 없다는 신념 위에서 건강한 성장이 있기는 어렵겠죠. 


술을 끊겠다는 다짐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제 삶의 변화가 두렵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좋겠고, 그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술을 안 먹는다고 핀잔을 듣기도 싫습니다. 그러면서 좋은 글과 좋은 음악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도 싶습니다.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다지 열심히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책해서 바뀌는 일도 없겠죠. 할 수 있는 걸 하나씩 해보겠습니다. 


그 시작은 술이라는 친구와의 이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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