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차
사람은 로봇이 아니에요
선생님 : 한 주 동안 어떠셨어요. 마음의 변화나 이런 게 있었나요?
나 : 전에는 누가 말을 걸면 대답을 안 했거든요. 어차피 화 내고 짜증 낼 거 뭐하러 대답해하면서요. 밥 먹자고 해도 화가 났어요. 할 일이 있는데 왜 자꾸 말을 걸지 하고요. 근데 이젠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내가 짜증을 내고 있구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구나'하는 걸 느끼게는 된 거 같아요. 그렇다고 그게 좋은 감정은 아니지만요.
선생님 : 감정을 알아차리게 됐네요. 그게 꼭 좋은 감정이 아니더라도요.
나 : 그런 거 같아요. 근데 그 순간이 너무 힘들어요. 그 감정에 압도당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머리가 멈추는 거 같아요. 차라리 아무 감정을 안 느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 사람들이랑 편하게 소통을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나 : 제가 평온한 상태를 기본값으로 생각해서 그런 거 같아요. 로봇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깐요.
선생님 : 사람이랑 소통하는 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때 가능한 거예요.
나 : 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릴 때 몸부터 닦는지 머리부터 닦는지 이런 것도 모르겠어요.
선생님 : 그런 게 왜 궁금한 거 같아요?
나 : 어렸을 때 경험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했어야 했는데 그걸 안 한 거 같아요. 부모님께서 집에 친구가 놀러 오는 것도 안 된다고 했고 놀러 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셨거든요.
선생님 : 그래요. 사람들이랑 경험하면서 쌓았어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그래요.
하나의 문제를 끝까지
선생님 : 아까 상담을 하면 선생님이 과제를 많이 준다고 했잖아요. 그럼 보통 "선생님, 과제를 이렇게 했어요." 하고 과제를 먼저 내놓거든요. 근데 다면 씨는 자꾸 다른 문제를 가져와요. 하나의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에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요. 이게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만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거기도 하고 욕심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나 :......
선생님 : 이러면 다시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게 되는데요.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라고 했잖아요. 다면 씨는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뭐가 문제인지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럼 한 주 동안 어떤 걸 해봤어요?
나 : 안 하고 미룬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또 한 주가 지났고요.
선생님 : 그럼 왜 그런 거 같아요?
나 : 그건 잘 모르겠어요. 과거의 기억 때문인 거 같아요. 과거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앞으로도 똑같이 반복되는 건 아닌데 자꾸만 그렇게 생각이 돼요. 그렇게 핑계를 대는 거 같기도 하고요. 정말 바뀌고 싶은 게 맞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정말 바뀌고 싶으면 행동을 했어야 하는 게 맞잖아요. 가족과 잘 지내고 싶으면 제가 말을 걸어보고 하면 되는데 그걸 자꾸 피해요.
선생님 : 꼭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죠. 지금 당장 해야 할 정도로 절실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걸 수도 있고요.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요. 근데 다면 씨는 이룰 수 없는 욕구를 자꾸만 이루려고 하고 있어요. 완벽주의가 있어요.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건 불가능해요. 조금씩,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는 거예요.
나 : 안 그래도 어제 그 생각을 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제 모습이 있고,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아가 있어요. 이 둘의 괴리가 저를 힘들게 하는 거 같은데요. 그러면 균형을 맞춰야 하잖아요. 전에는 이상적 자아가 있는 곳까지 저를 끌어올려서 따라가려 했거든요. 근데 그것보단 이상적 자아를 내리는 게 필요할 거 같아요. 그것도 제 지금의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인정할 때야 가능한 거 같은데요. 제가 생각하는 제 모습도 실제의 제 모습보다 위에 있는 거 같아요. 근데 그걸 인정하기가 싫은 거 같아요.
선생님 : 맞아요. 잘 알고 있어요. 그럼 그건 왜 그럴까요?
나 : 그걸 인정하면 제가 못난 사람이 되니깐요. 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기본값이 있는데 그것만도 못하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자꾸만 그렇게 보는 거 같아요. 높은 기준을 두고요.
선생님 :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문제를 틀리면 틀렸다고 표시를 해야 하잖아요. 근데 그게 싫어서 세모를 치거나 반달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가 20점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어려워서요. 근데 그러면 나중에 이거 알았는데 이러면서 또 틀리게 돼요. 그만큼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게 어려운 거예요. 공부가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나 :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 과목이 여러 개가 있을 거잖아요. 영어, 국어, 수학 이런 식으로요. 그럼 한 과목만 정하는 거예요. 그리고 몇 점을 맞을 수 있는지 목표를 정해서 그거 하나만 집중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렇게 조금씩 점수를 올리면서 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해야 해요. 만약에 그렇게도 안 오르면 한 과목에 한 단원만 파보는 거예요. 그 단원에서 나온 문제들을 더 맞출 수 있게요. 그렇게 조금씩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거예요.
머리가 하얘져요
선생님 :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좋은 점은 뭐가 있어요?
나 : 잘 모르겠어요. 전에는 '꾸준히 한다.', '나쁜 짓 안 하려고 한다'라고 대답했는데 그게 진짜인지도 모르겠어요. 거짓말 같아요.
선생님 : 그럼 부정적인 건요?
나 : 문제가 있을 때 회피하려 하고요. 착한 척하려는 거 같아요. 내 표현도 잘 안 하고요.
선생님 : 그럼 다시 생각해볼까요? 그게 정말 나쁜 거고 좋은 거일까요? 49대 51 아닐까요? 만약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전혀 회피도 안 하면 다 싸우고 다니지 않을까요? 그게 정말 나쁘기만 할까요? 모든 일에는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고, 나쁜 점이 있으면 좋은 점도 있을 수 있어요.
나 : 그건 또 그렇네요.
선생님 : 제가 더 많이 말을 하는 거 같네요. 다면 씨는 대답만 하고요.
나 : 곰곰이 생각해보니깐 상담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요. 어차피 행동하고 바뀌는 건 제가 해야 하는 거잖아요. 상담으로 정신적인 변화가 있다고 해도 그게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선생님 : 그것도 맞아요. 결국 행동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 근데 '왼쪽으로 갈까요?', '오른쪽으로 갈까요?' 고개를 돌려 의견을 물어봤을 때 '왜 왼쪽으로 가고 싶은데요?'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랑 없는 거랑은 엄청 큰 차이예요. 지지하는 사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완전 다른 거예요. 그럼 왜 선택하고 행동하는 게 어려운 거 같아요?
나 : 망할 거 같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요. 돈을 쓸 때도 엄청 고민하고요.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제가 다 책임져야 할 거 같고요. 근데 그게 무서운 거 같아요.
선생님 : 정말로 도와줬던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요?
나 : 아뇨.
선생님 :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안 도와줬다가 맞는 거 아닐까요.
나 : 그것도 맞네요. 그냥 제가 무서운 거 같아요. 선택하고 책임지는 거요. 익숙한 쪽으로 자꾸 가려고 해요.
그만큼 힘들었던 거예요
나 :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음악을 하려면 시창, 청음을 해야 하거든요. 이게 언어로 따지면 가나다라를 아는 거랑 비슷해서 이걸 모르면 음악을 제대로 못 하거든요. 근데 제가 청음 수업을 듣는데 엄청 졸린 거예요. 저는 처음에는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이렇게 생각하고 더 집중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청음 수업이 있기 전날부터 스트레스를 받고요. 청음 수업을 받고 나면 완전히 진이 빠지고요.
졸업하고 나서도 어쨌든 해야 하니깐 스톱워치를 켜고 시간을 조금씩 늘려나갔거든요. 근데 오분도 안 돼서 엄청 졸린 거예요. 그냥 졸리다 이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무력하고 피곤해져요. 책상 앞에서 졸고 있어요. 눈이 막 감겨요. 이게 의지로 어떻게 안 될 정도로요. 전에 일을 다녔을 때도 사람들이 여덟 시간씩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어요. 저는 그땐 앉으면 어디서든 잤어요. 버스에서도 자고, 지하철에서도 자고, 공연장 앰프 앞에서 잠든 적도 있어요.
선생님 : 감정은 억제하고 머리는 과부하가 되니깐 뇌가 멈추는 거예요. 기면증이랑 비슷한 증상일 수 있어요. 생각에 초점이 잘 안 맞죠? 이 생각을 하려고 했는데 그 생각이 잘 안되고 멍해지죠? 아니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거나요. 그만큼 힘들고 스트레스받았던 거예요.
나 : 가족들은 그런 저를 보고 게으르다고 하고,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냐고 빨리 일어나라고 했으니깐요. 저는 제가 게으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더 뭔가를 하려고 했어요. 일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만큼 일을 더 하려고 했고요. 시간이 비면 공부를 하든 강의를 듣든 일을 더 하든 해서 그 시간을 다 채웠어요.
선생님 : 잘 표현해줬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니깐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사람인지 알겠어요. 엄청나게 힘들었던 거예요. 다른 사람들하고 같은 일을 해도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었던 거예요. 이상한 게 아니에요. 가족 하고도 이렇게 표현하면 돼요.
나 : 원망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내가 이렇게 힘든데 아무도 못 알아준다는 걸요. 그래서 지금도 가족한테 더 예민하게 굴고 짜증부터 나는 거 같아요. 다른 사람한테는 그러지 않을 일도 가족한테는 그게 잘 안 돼요.
선생님 : 그래요. 그렇게 자기표현을 조금씩 하는 거예요. 뭐든지 조금씩 하면 돼요. 한 번에는 못 바꿔요. 아주 잘했어요.
나 :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나려고 해요.
선생님 : 눈물이 나는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기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거고요. 근데 그러면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었어요?
나 :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거 같은데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거나요. 산책을 하기는 했어요.
선생님 :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죠. 근데 좋아하는 거를 해야 해요. 마이너스가 있으면 플러스도 있어야 하거든요. 일이 좋아서 일을 늘리는 거면 괜찮아요. 일로 스트레스가 풀리면요. 근데 그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나 : 스트레스는 더 받죠. 근데 그걸 해소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한 거 같아요.
선생님 : 자기가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해요. 좋아하는 것도 할 줄 알아야 해요. 시간이 다 됐네요. 오늘 상담을 정리하자면 어떤 거 같아요?
나 : '일단 해라'로 요약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선생님 : 좋네요.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도 좋아요. 그럼 다음 주에 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