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을 쓰지 못하는 비평가
말과활아카데미, <'나'를 탐구하는 글쓰기(aka.비평쓰기 3기)>, 1강 후기
혓바닥 비평가
나는 나를 설명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비평이라는 단어를 꺼내놓았다. 비평이라곤 학부생 시절 과제로 끄적여본 게 전부임에도 말이다. 시나 소설의 형식을 따라 쓸 수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문학이 되는 건 아니었다. 독자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도, 감동도 없었기에 소설이나 시의 형식을 빌린 일기에 그쳤다. 칼럼이나 에세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숨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길을 찾지 못해 이도 저도 아닌 글을 써놓고 지우길 반복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나, 글을 쓰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이 나를 책상 앞에 앉도록 했지만 '나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건 비평이었다. 비평은 나를 철저히 배제한 채 타인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읽어내면 되는 작업이라 여겼다. 최대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쓰려했다. 고치고, 물어보고, 고치고, 찾아보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지식들을 나의 언어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즐겁기도 했다. 그렇게 한 편의 글을 쓰고 나면 다음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지쳐버리곤 했다. 그만큼 열심히 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글에 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공을 들이느라 지나치게 많은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감정을 다루는 법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감정을 드러내는 건 미성숙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내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다. 그 방법으로 글에서 '나'를 제거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어떤 글도 객관적일 수 없다. 내가 어떤 주제로 글을 쓸 것인지 정하는 것부터 주관이 개입한다. 무엇이 뉴스가 되고 뉴스가 되지 않는가. 이 또한 당연히 주관적인 요소다. 객관을 지향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주관을 완벽히 배제한다는 건 단연코 불가능하다. 애초에 실현할 수 없었으므로 실패는 당연한 일이었다. 말로는 비평을 떠들고 다녔지만 비평을 쓰지 않는 기간이 더 길어졌다. 허울뿐인 비평가였다.
나는 왜 비평에 꽂히는가
그러다 얼마 전 말과활아카데미에서 <나를 탐구하는 글쓰기>라는 제목을 보고 제대로 꽂혔다. 금요일에 일정이 꽉 차 있고,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도 더 이상 일을 벌이는 건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신청을 했다. 내가 비평을 쓰고 싶은 게 맞는 걸까. 괜히 또 비평을 하는 이미지만 소비하려는 건 아닐까. 고도 들었다. 하지만 비평이 나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첫 수업에서 강의의 전반적인 내용, 진행 방식을 듣고 나서 「공각기동대」에 대한 감상을 나누었다.
「공각기동대」의 큰 주제 중 하나인 '타인과 나를 변별할 수 있도록 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나를 나이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자기 서사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강사님은 감상 중간에 '사람은 자신이라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과거의 일들을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 이야기하거나 이해하며, 변화는 이 자기 서사를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렇다면 내가 심리상담을 받으며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고 그 사실들을 인정하는 것 또한 자기 서사를 만들어가는 일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우울증이라는 병명을 진단받기 전까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자기 서사를 만들지 못했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다. 하지만 우울과 불안이 신체적 증상으로 존재하고, 일상에도 영향을 주는 상황이 되었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작업은 무의식에 갇혀 있었던 나의 억압된 감정이나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 즉 정신분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서사를 통한 자기 자신의 이해
나는 심리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지적 흥미를 느낀다. 여러 정보를 통해 근거를 찾는 비평과 유사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을 하나의 텍스트로 놓고 보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고,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 작업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만 머리가 먼저 반응하는 습관이 쉬이 바뀌지는 않는다. 너무 오래전부터 살기 위해 감정을 나에게서 분리시켜왔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비평에 자꾸만 관심을 가졌던 것은 나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내면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현실에서 나를 이해하는데 실패했기에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텍스트를 통해서라도 나를 이해해보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치유의 입구까지는 찾아왔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좋다, 나쁘다고 판단을 내린 작품들은 나라는 존재를 통해 재해석된 것이므로 그 좋고 싫음의 감정의 근원은 나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고, 객관적인 문장을 쓰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비평 또한 텍스트를 해석하는 주체인 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비평 또한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를 설명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비평이라는 단어를 꺼내놓았던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