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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Mar 27. 2022

나는 ACOA(알코올중독자 자녀)다

콜 포비아

나는 ACOA(알코올중독자 자녀)다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를 COA(Children of Alcoholics)라고 부른다. 20세가 넘으면 앞에 A(Adult)를 붙여 ACOA라고 부른다. 나는 스물이 넘었으므로 ACOA다. 사람에 따라 다양한 증상이 있을 수 있지만 나의 경험과 여러 자료들을 근거로 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데 서툴다

2. 항상 불안함을 느낀다

3. 타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게 어렵다

4.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5. 과거의 사건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6. 이인감(현실감상실, 해리성 장애)을 느낀다

7.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에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8. 전반적으로 우울하다.

9. 불안이 심해지면 공황증상이 온다

10. 관계에 집착한다

11.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술, SNS, 관계, 일 등)

12. 모든 일을 지식화, 체계화 하려 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함이나 좌절감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전화에 대한 공포(call phobia·통화 공포증)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느 방식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신념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이 신념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인지하기 어렵다. 단순히 전화가 두렵다, 무섭다라고 생각될 뿐이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타인의 대한 불신은 물론 내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나 죄책감 등이 있을 수 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연약한 모습, 떠는 모습, 불완전한 모습 등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여기고 있을 수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심장이 떨리고 손이 차가워진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시나리오를 다 짠다. A라고 말하면 H라고 대답하고, B라고 말하면 J라고 대답해야지. H라고 말했을 때 C라고 말하면 I라고 대답하고...이러다보면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전화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그러다 막상 전화를 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그러면 나는 전화를 끊고 그것까지 예상하지 못한 나를 다그친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아까 이렇게 대답했어야 하는데. 하면서 말이다. 전화에 대한 과거의 기억에는 아빠가 꼭 존재한다.



술에 취한 아빠는 연락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다반사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저녁이 되면 아빠에게 전화를 거는 게 일이었다. 수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전화를 걸고 또 걸면서 나는 생각했다. 제발 받아라. 아니, 제발 받지 말아라. 받으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받으면 화를 낼 게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만 내 임무는 엄마에게 '아빠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는 거였다. 수화기에 귀의 온도가 다 옮겨가고 나서야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임무를 다 했음을 엄마에게 전했다. 그럴수록 엄마의 불안은 더 커졌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와 하나가 되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정말 이가 닥닥닥 부딛힐 정도로 공포에 떨었다.


나의 ACE 점수는 7점이다

나의 오늘의 행동들은 과거의 경험과 선택을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청국장을 좋아했던 사람은 점심으로 청국장이 나와도 맛있게 먹겠지만, 청국장을 먹고 체했거나 크게 배앓이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미간부터 찌푸릴 수 있다. 같은 외부의 자극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어떤 자극에 우울해 하거나, 불안해하거나, 공황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과거에 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이 ACE[부정적인 아동기의 경험(Adverse Childhood Experience)]다. 설문지는 아래와 같다. 

당신이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1. 부모나 집안의 다른 어른이 자주 당신에게 욕설을 하거나, 모욕하거나, 조롱하거나, 굴욕감을 주었나요? 또는 당신이 몸을 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도록 행동했나요?

2. 부모나 집안의 다른 어른이 자주 당신을 밀치거나 세게 움켜잡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당신에게 무언가를 던졌나요? 또는 당신에게 맞은 자국이 생겼거나, 다칠 정도로 세게 때린 적이 있나요?

3. 어른이나 최소한 당신보다 다섯 살 많은 사람이 한 번이라도 당신을 만지거나, 애무했거나, 또는 당신에게 성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만지게 강요한 적이 있나요? 또는 당신에게 구강, 항문 또는 질 성교를 시도했거나, 실제로 한 적이 있나요?

4. 당신은 가족 중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당신을 중요하거나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또는 가족들이 서로를 위하지 않거나, 가깝게 느끼지 않거나, 지지해주지 않는다고 자주 느꼈나요?

5. 당신은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거나, 더러운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당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또는 부모가 술이나 마약에 너무 취해 있어서 당신을 보살피지 못한다거나, 필요할 때 당신을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다고 자주 느꼈나요?

6. 당신의 부모는 별거한 적이 있거나, 이혼했나요?

7. 누가 당신의 어머니 또는 양어머니를 자주 밀치거나, 세게 움켜잡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그녀에게 무언가를 집어던졌나요? 또는 이따금 또는 자주 발길질을 하거나, 물거나, 주먹으로 때리거나, 단단한 것으로 때렸나요? 또는 적어도 몇 분 이상 계속해서 때렸거나, 총이나 칼로 위협한 적이 있나요?

8. 당신은 술 문제를 일으키거나, 알코올중독자인 사람 또는 마약을 하는 사람과 함께 살았나요?

9. 가족 구성원 중에서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에 걸렸거나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있었나요?

10. 가족 구성원 중에서 감옥에 간 사람이 있었나요?

'예'라고 답한 수를 더하시오. 이것이 당신의 ACE 지수입니다. 

네이딘 버크 해리스 지음, 정지인 옮김, 심심, 2019, pp.425~428


설문지에 따르면 나의 ACE 점수는 7점이다. 그리고 4점이 넘으면 아래와 같이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ACE가 하나도 없다고 보고한 사람들에 비해 ACE 지수가 4점 이상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환을 경험할 가능성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높게 나타났다. 

△허혈성 심장질환 2.2배 △모든 종류의 암 1.9배 △만성 기관지염 또는 폐기종(만성폐쇄성폐질환)3.9배 △뇌졸중 2.4배 △당뇨병 1.6배 △자살기도 12.2배 △심한 비만 1.6배 △ 지난 한 해 동안 우울한 기분으로 2주 이상을 보냄 4.6배 △불법 약물 사용 경험 4.7배 △약물 주사 경험 10.3배 △현재 흡연 중 2.2배 △성병 감염 경험 2.5배(자료 출처 : Feltti, 1998) 

네이딘 버크 해리스 지음, 정지인 옮김, 심심, 2019, pp.435


일생동안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이드 브레이크가 채워진 것처럼 진전이 잘 안 돼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우울하고, 에너지가 없는 상황이 반복됐다. 나는 이게 나의 의지나 지능의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멍청해서, 노력하지 않아서 남들이 다 하는 일을 못 하는 거라고 여기면서 살았다. 그럴수록 자존감은 점점 더 낮아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들이 생겨났다. 정말 최선을 다 해도 성과를 못 내거나, 정말 사소한 일임에도 마무리가 되지 않을 때는 이것이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고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과거에 있었다. 과거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과거가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부정적인 기억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다루는 수밖에는 없다. 오랜 시간과 에너지, 비용이 들 것이라는 걸 알지만 과거를 한탄하고 부모를 탓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솔직히 억울하다. 환경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님에도 내가 이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바꿀 수 없다면 인정하는 수밖에는 없다. 이미 이렇게 되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현재와 미래밖에 없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비록 사라지게 할 수는 없겠지만 해체하고 재정립 할 수는 있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가정 폭력을 당했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문장을 '나는 가정 폭력이 있는 집안에서 성장해 무기력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했다'고 스스로를 응원하는 식이다. '가정폭력'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주체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책과 무기력, 죄책감, 수치심에 빠져서 살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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