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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an 22. 2022

부정적 감정'만' 제거할 순 없다

22년 전 일기장에는 아픔, 고통, 싸움, 죽음 등이 없었으면 하는 아이가 있다. 술을 마시고 폭력을 쓰는 아빠, 부모님의 다툼을 보며 나는 언제 아빠나 엄마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고통스러웠다.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불안 사이에서 나는 감정을 차단했다. 아픔, 고통, 싸움, 죽음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내 삶에서 사라지길 바랬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야 울지 않을 수 있었고, 평온한 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정을 선택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었다. 기쁨, 행복, 사랑 같은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행복한 일이 생기면 어색했고, 누군가 칭찬을 하면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면서 그 사람의 안목을 낮게 평가했다. 무표정하거나 혹은 일부러 즐거운 척하면서 웃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라지면 바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나는 삶을 나쁨과 나쁘지 않음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었다. 그러니 삶은 언제나 삭막했다. 좋음이라는 건 없고 그나마 나쁘지 않은 상태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긍정/부정이라는 판단부터가 문제였다. 모든 감정은 옳다. 그냥 느낄 뿐이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아픔, 고통, 싸움 또한 인생에서 제거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들이다. 행복이나 기쁨도 마찬가지다.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이 있어서 한쪽 감정을 느끼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정하고 눌러놓은 감정은 불안과 우울로 나타났다. 우울한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감정을 더욱 억제해봤지만 우울이 심화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나는 최소 22년 전부터 감정을 차단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훈련했다.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불편함이 있다. 나를 표현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지도 못한다. 내 감정과 나의 상태를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를 잘할 수는 없다. 내가 아픈지, 배가 고픈지, 피곤한지도 모르는 사람이 행복하기는 어렵다. 


서른이 되었지만 내면은 아직 어린 아이다. 그래서 여전히 나의 감정을 기록하고, 꿈 일기를 쓴다. 불쑥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지 않되, 그 감정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다. 모든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 훈련을 하는 중이다.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긍정/부정으로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긍정에 가산점을 준다. 고통스럽지만 고통과 괴로움은 다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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