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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an 27. 2022

양자토론회, 소소하고 확실한 불행

  이번 대선은 정말 찍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전부터 찍을 사람이 없다는 말은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정말로’ 없다고 치자. 그러면 왜 찍을만한 사람이 없을까. 천 년 만에 나타난 인재는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표를 줄 수 있겠다’ 싶은 후보들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각 당의 대선 후보를 뽑고 나니 의외의 혹은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거대 양당의 두 후보가 각 당의 후보로 결정된 것이다.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결과다. 우리는 이 결과에 따라야 한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거대 양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 다수이다. 이게 현실이다. 


  우리나라는 단 한 표라도 더 가져가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구조다. 패배자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니 뽑힐 만한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국민 입장에서도 효능감이 가장 높다. 내 손으로 뽑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분을 느끼려면 뽑힐만한 사람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 우리 삶도 그렇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라 하더라도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면,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으면 내가 포기하기도 전에 주변에서 뜯어말린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거 하다가는 굶어 죽기 딱 좋다’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회보단 할 수 있는 걸 하는 사회에 가까워진다. 


  그래서일까. 두 후보는 양자 토론회를 하겠다고 했다. ‘뽑고 싶은 후보’가 아니라 ‘뽑을 수 있는 후보’ 둘이서 말이다. 심지어 법원이 양자토론은 안 된다고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후보는 제3의 공간에 방송사를 초청해 양자토론을 하자고 재차 요청했다. 분명히 둘 중에는 찍을 사람이 없다는 소리로 아우성인데 말이다. 이처럼 언론과 사회는 ‘뽑힐 만한 후보’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둘 중 한 사람을 뽑지 않는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확실한 결과가 예상되지 않더라도, 화려한 영광을 얻을 수 없더라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다수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차피 될 사람들이 될 거라면 안 될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수렴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토론의 방식은 방송사 자율로 정한다’는 말에도 일정한 민주적 책임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법원은 ‘양자토론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대상자 선정에 관한 언론기관의 재량에는 일정한 한계가 설정돼야 한다”라고 판단했다. 법원의 판결을 환영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불행으로 가는 길. 양자 토론회를 명백히 반대한다. 그럼에도 양당의 후보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또 다음 대선이 치러질 것이고 우리는 또 뽑을 사람이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정치에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할 것이다. 왜냐면 ‘뽑기 싫은 사람’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거울과 같다. 정치판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될 놈만 밀어주고, 적의 적과 한 편이 되고, 가치관이나 신념이 물질이나 권력 앞에서 흔들리는 것.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천천히 소소하고도 확실한 불행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대선을 거듭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어차피 안 될 사람’이라면서 의견을 들으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거나, ‘저 후보는 절대 안 돼’라면서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정말 찍을 사람이 없는 지경이 와버린 것이다. 거대 양당, 기득권을 타파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냥 두면 관성대로 굴러간다. 그리고 그 길에는 양자 토론회와 같은 소소한 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번 기회에 하나라도 바로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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