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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D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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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영 Dec 07. 2015

커피를 볶았다.


커피를 볶았다.

타의에 의해 볶으게 되었다.  지난여름날이었다. 출장 갔다 온 마누라가 큰 검정 비닐을 무겁게 들고 온다. 그리고는 툭 던지며 "커피야".

"한 5 kg  될 거야". 오키로? 하루에 30g을 먹는 다 치면 166일 걸린다. 1 kg 체 갈아 마시기도 전에 맛이 갈 건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 봉지를 열었다. 이런 젠장할!. 생원두다.  뭐 어쩌라구 ?!. 신사동 엘 카페 딸 가서 볶을까? 아님 동네 로스터리 카페에 가져가서 부탁할까 하다 그냥 볶아 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200g 정도 원두를 사용하는 데 25번을 가서 부탁할 수 없는 거 아닌가. 1kg씩 하더라도 5번이니 부탁하기도 힘들거니와 귀찮음도  한몫을 했다. 


슬렁슬렁 인터넷 검색을 하고(예전에 연남동 이심 사장님이 망명정부 시절 로스터리가 아닌 자가 제작한 도구로 가스레인지에서 볶던 생각도 났다) 프라이팬에 겁 없이 볶았다. 나름 불 조절했고, 열심히 불 앞에서 주걱 들고 열심히 했지만 탄 것도 있고, 덜 볶인 것도 있고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꼴에 검색을 통해  주워들은 풍월로 선풍기에 원두를 빨리 식혔다. 빨리 식히지 않으면 수분이 어쩌고 저꺼고 한다 하니 절차를 따랐다. 그라인더를 꺼내 갈았다.. 드륵(탄것), 드르 틱!(덜 볶은 거), 드륵.. 드륵 틱! 

불협화음이 '니 주제에.. 쯧쯧' 혀 차는 소리로 들렸다. 원두를 가는 사이 물이 다 끓었고 융과 서버에 얼음을 담아 저 드립을 내렸다. 뭐.. 뭐...뭐................. . 했봤다는데 큰 의미를 둔 행위였다(쓴맛,  떫은맛이 든 시원한 물). 커피 맛은 단 일격에 자가 배전의 의지를 꺾었고 바로 원두를 주문했다. 


어느 날.

커피가 없음을 알았다. 주문을 까먹었다. 원두가 슬슬 유혹을 한다. 다시 해 봐.

동일한 온도가  필요해!라는 단순한 생각. 

오븐을 150도에 맞춰 예열을 하고 원두를 넣었다. 프라이팬 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볶아진 커피 알갱이가 날 비웃는다.

설거지를 하고

싱크대에 냄비를 넣는데 양면팬 손잡이가 눈에 확 띈다. 팬과 냄비 사이에 콕 박혀 있던 양면팬을 꺼내 볶았다. 예열을 하고 팬 가득히 원두를 채우고 볶았다. 우히히... 여전히 볶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이후로 양면팬으로 커피를 볶는다. 어느 날은 강하게, 또 어떤 날은 약하게 커피를 볶으며 맛을 본다. 재미지다. 일주일에 두 번 재미난 것을 했다. 


오늘 커피를 볶았다.

문득 온도가 너무 높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스 불을 낮추고 양면팬에 들어가는 양도 줄였다. 팬을 위, 아래,  위아래로 흔들며 시간을 좀 더 주었다. 

틱! 틱! 원두가 튀는 소리가 들린다. 

연기가 나지만 평소와 다른 옅은 탄내다. 살짝 기대가 들었다. 오늘은 좀 되려나?.


커피를 볶았다.

물을 올리고

오래간만에 청소한 그라인더를 조립했다.

'드르륵, 드르륵' 깔끔하게 갈린다.

 물이 끓었다.

융을 준비하고 커피를 내렸다. 융 안에서 보글보글 커피 거품이  올라온다.

커피 탄내가 나던 거실에 살짝 히 커피 향이 난다. 

여전히 난 이 원두가 어디서 왔는 지를 모른다. 

마누라가 산지를  까먹은 탓이다. 그렇게 몇 개월 커피를 볶았고, 내렸다.


커피 찌꺼기를 버린다.  어느새 융이 낡았다.

융을 바꿀 때가 되었다.  


바꾸거나 바뀌거나 그러면서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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