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먹는 감자가 맛없는 과학적 이유

'가공 적성'의 함정, 그리고 사라진 '남작'을 찾아서

by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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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식품팀장으로 일하던 시절, 나는 미친 듯이 감자를 찾아 헤맸다. 여름이면 지천에 널린 게 감자라지만, 내가 팔고 싶은 ‘진짜 감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소문 끝에 양재동 AT센터까지 연락해 경북 영덕의 한 유기농 생산자를 만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기농 생산자를 소개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감자 품종을 심는 사람을 찾은 것이었다.


1. '분' 나는 감자를 찾아서

두백.jpg 두백을 찾아 떠났던

내가 찾던 감자는 입안에서 포슬포슬하게 부서지는, 일명 ‘분(粉) 나는 감자’였다. 그중에서도 1928년 홋카이도에서 도입된 **'남작(男爵)'**이 목표였다. 이름의 유래가 귀족이든 뭐든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혀끝에 닿는 그 포슬포슬한 식감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남작은 이미 국내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대신 영덕의 생산자 부부가 심고 있던 **'두백'**이라는 품종으로 타협해야 했다. 두백은 당시 시장을 주름잡던 '수미'보다는 훨씬 포슬포슬했고 식감이 좋았다. 나는 이 감자를 합정동의 한 이탈리아 식당에 소개했고, 셰프는 대표 메뉴인 문어 샐러드에 수미 대신 두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두백 역시 태생적으로 남작만큼 맛있는 감자는 아니었다.


2. 감자 맛의 역설, '갈색화 반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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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감자를 삶았을 때 포슬포슬하면 분질, 쫀득하면 점질이라 부른다. 시중의 '수미'는 이 두 성질을 다 가진 어중간한 감자다. 따뜻할 땐 분질 같다가도 식으면 쫀득해진다. 그래서 식은 수미 감자로 샐러드를 만들면 부드럽게 으깨지지 않고 떡처럼 덩어리진다.

그렇다면 왜 '남작'이나 '하령'같이 맛있는 분질 감자는 사라지고, 맛이 덜한 감자들이 식탁을 점령했을까? 여기에는 **'식품 가공의 과학'**이 숨어 있다.

핵심은 **'갈색화 반응(Maillard reaction)'**이다. 맛있는 감자일수록 당분과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이 성분들은 열을 만나면 반응하여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변하고 풍미를 낸다. 오븐 속 식빵이나 노릇한 누룽지가 맛있는 이유다.

문제는 감자칩이다. 감자칩을 만들 때 당과 아미노산이 많은 '맛있는 감자'를 쓰면 색이 너무 진하게 변해버려 탄 것처럼 보인다. 반면, 당과 아미노산이 적은 감자는 튀겨도 뽀얀 하얀색을 유지한다. 즉, 우리가 마트에서 만나는 감자들은 '찌거나 구웠을 때 맛있는 감자'가 아니라, '튀겼을 때 하얀색이 나오는 감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가공 적성(Processing Suitability)'이다. 대기업들이 감자칩용으로 대량 매입을 해줘야 농가는 돈이 된다. 그러니 농부들은 맛이 좋지만 모양이 울퉁불퉁하고 가공하기 힘든 '남작' 대신, 칩 만들기 좋은 '두백'이나 '수미'를 심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장이 좋아하는 감자는, 우리 입에는 맛이 없는 감자다.


3. 홋카이도에서 만난 진짜 감자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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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홋카이도 여행 중 후라노의 꽃밭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비가 쏟아져 관람을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한쪽 구석의 감자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못생기고 울퉁불퉁한 **'남작'**이었다. 한 봉지에 150엔. 남들은 라벤더 기념품을 살 때 나는 주저 없이 감자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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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 숙소에 돌아와 감자를 쪘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초등학교 시절 희미하게 남아있던 '진짜 감자'의 기억이 선명하게 소환되었다. 함께 먹던 딸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음식은 진짜 맛있으면 말이 없어지는 법이다. 방금 밥을 먹었음에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감자 네 알 중 세 알을 해치웠다.

우리나라에서 남작이 사라진 건 맛이 없어서가 아니다. 너무 맛있어서(당이 많아서) 가공하기 힘들고, 못생겨서 상품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가공 적성'이 뛰어난, 즉 튀기면 하얗고 예쁘지만 삶으면 밍밍한 감자들이 '최고급'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언젠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는 만큼 맛있다." 우리가 무심코 먹는 감자 한 알에도 자본의 논리와 과학적 타협이 들어있다. 진짜 맛을 찾고 싶다면, 남들이 심지 않는 감자, 공장이 외면한 '못난이 감자'를 찾아야 한다. 그 불편함 속에 진짜 미식(美食)이 숨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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