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존중을 표현하는 방법_집밥]
검은콩물국수
며칠 전 엄마가 나에게 검은콩 좀 가져가라며 연락을 주셨다. 집에도 넘쳐난다고 했더니 여태 안 먹었냐고 의아해하시며 아무튼 집에 들러서 가져가라고 하셨다. 엄마가 만약 그동안 내게 주신 양을 기억하신다면 절대 저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거다.
어찌 되었든 올해도 우리 집은 검은콩 풍년이다. '콩과 쌀의 비율을 1:1로 해서 밥을 지어 버릴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가 작년에 맛있게 해 먹었던 검은콩물국수가 떠올랐다. 콩 껍질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만드는 과정이 너무나도 간단하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요리다.
우선 콩을 잘 씻어내어 깨끗한 물에 불린다. 1시간 정도 지나면 콩이 불려지는데 앞서 말한 대로 껍질을 싫어하지 않으면 바로 끓는 물에서 익힌다. 만약 껍질을 먹고 싶지 않다면 껍질을 벗겨낸 후 알맹이만 익히면 되는데 껍질 벗기는 것 자체는 쉽게 되지만 그 양을 잘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나의 경우, 콩을 사랑해서 정말 다행이다.
콩이 익으면 찬물에 식힌 뒤 믹서기에 넣고 물을 살짝 넣어서 갈아준다. 믹서기의 성능에 따라 콩의 분쇄되는 정도가 달라지니 원하는 만큼 갈아주면 된다. 나는 살짝 식감이 있는 상태를 싫어하지 않기에(그리고 우리 집 믹서기가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콩 형태가 사라질 때까지만 갈았다.
그리고 찬물을 적당량 넣어 원하는 농도로 만든 뒤 국수를 삶아 콩물에 넣고 오이를 채 썰어 그 위에 살포시 올려주면 끝이다. 불리고 삶는데 시간이 좀 걸리 뿐 실제로 내가 몸을 움직여가며 만드는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아서 집에서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라 여름에 한 번씩은 해 먹었던 것 같다. 내 짝꿍도 처음에는 귀찮으니 그냥 사 먹거나 콩물을 사서 해 먹자고 했지만 몇 번 뚝딱 만들어줬더니 지금은 해준다고 하면 군말 없이 알겠다고 한다. 내 짝꿍의 마음까지 사로잡아버린 검은콩물국수다.
검은콩물국수에는 빠져서는 안 되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김치다. 배추김치든 열무김치든 깍두기든 뭐든 고춧가루 양념이 잘 버무려진 김치를 국수 위에 올려서 먹으면 정말 맛있다. 김치 하나면 충분하다.
그리고 간혹 여기에 설탕이나 소금을 쳐서 먹기도 하는데 나는 아예 넣지 않는다. 안 넣어도 내 입에는 맛있다. 뭔 맛으로 먹냐고 물어보는 분들도 있지만 아무튼 내 입에는 맛있다.
맛있게 한 끼 식사를 끝내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의 넘치는 사랑도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지난날의 과거의 추억도 생각났다. 사실 콩은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콩은 나의 꿈, 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했던 친구였다. 연구원이 되기 위해 발을 디뎠던 실험실에서 졸업 논문 주제로 만나 다양한 품종의 콩들도 만났고 함께 밤을 지새웠고 덕분에 원하는 곳에 취직해서 '연구원'이라는 직함도 가질 수 있게 해 줬다. 건강상의 문제와 여러 복합적인 상황들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 다시 그 꿈을 예전처럼 행할 수 있을지도 희박한 상황이지만 매일 먹는 집밥에서 여전히 만날 수 있어 기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에 주어진 현실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꿈을 내려놓는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것 같은 찢어지는 고통의 순간이다. 퇴사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 나는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새로운 꿈도 꾸고 있다. 이렇게 또 지금의 순간을 적응해 가고 있다.
검은콩물국수가 내 입안으로 후루룩 지나가듯이 아팠던 마음도 후루룩 지나가 평온한 마음으로 집밥을 먹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