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매뉴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by 코코 COCO

어릴 때부터 아이는 아침이면 내가 일어나는 걸 금세 알아채고 칭얼거리며 나를 찾았다. 내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했을 당시, 출근 시간보다 2시간 더 먼저 일어났던 이유이다. 기차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했기에 일정 시간대를 놓치면 반차를 써야만 했다. 출근 준비와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준비는 30분이면 충분했지만 준비를 다 마치기도 전에(30분 채 안 걸려서) 일어나 나를 찾는 아이가 잠에서 온전히 깰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가 소풍 가는 전날이면 차 하나 없는 계획을 짰다. 만일 아이가 도시락을 싸는 중에 일어났을 상황까지 대비한 그야말로 완. 벽. 한. 계. 획. 나는 금손을 가진 엄마가 아니었기에 아이의 소풍 전날 밤은 어느 때보다도 긴장된 마음으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아이가 원하는 도시락 메뉴는 언제나 '유부초밥'이었다는 점이다. '김밥'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어질어질하다. 그 많은 속재료를 언제 다 자르고 볶고 싸맨단 말인가?


'김밥'이라는 고난도는 아니었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을 난관들(내 기준에서) 속에서 나는 도시락을 만들었다. 그 결과물을 바라볼 때면 내 마음속에 작은 성취감이 폴폴 올라왔다. 사진을 찍어 남편과 가족들에게 보내면 어설픈 모양으로 꾸민 도시락이었음에도 가족들은 맛있게 보인다며 내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하원한 아이의 가방 안에는 늘 텅텅 비어있는 도시락 통이 들어 있었으며 알림장 속 아이가 도시락을 먹는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고된 등원 준비였지만 정말 기뻤다.

지금은 키가 큰 만큼 마음도 자란 아이는 이제 내 상황을 이해하고 더 이상 울지 않는다. 나 역시 예전보단 능숙하게 해낸다. 전업주부가 되니 더 이상 기차 시간에 얽매일 필요도 없어졌다. 그러나 엇보다 나에게 큰 힘이 되었던 건 반복적인 도시락 준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립된 '도시락 매뉴얼' 덕분다.


나는 어떤 일을 마주할 때면 시다발적으로 여러 생각들이 퍼져나가곤 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찾는 데에는 용이했지만 간결하고 빠른 일처리를 할 때에는 오히려 시간을 지체하는 상황을 종종 마주해야 했다. 그래도 끊임없는 노력을 하다 보니 '도시락 매뉴얼'과 같은 나름 뿌듯한 결과의 산물을 얻게 되었다. 물론 쉽게 얻어진 건 아니었다. 잘하려고 했던 노력들이 오히려 일이 더 커지기도 했고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예상보다 더 늦게 일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본성을 거스를 순 없다 보니 소소한 일들이 내 열정과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었다(예를 들어 음식을 조리할 때, 여러 메뉴들을 동시에 만들려고 하다 보니 주방이 난장판이 될 때가 있다던지 하루에 해내야 할 일과들이 많을 때 머리가 지끈거린다든지 등등).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올해 3번 준비해야 했던 아이의 소풍 도시락을 성공적으로 준비해 냈다.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마다 느끼는 성취감은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이의 등원 준비를 하니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자신감이 붙자 바쁜 남편의 아침 출근길을 위한 주먹밥 5종을 6개씩 총 30개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막판에 남편의 도움을 받았지만 예상 시간보다 살짝 빨리 주먹밥 5종을 만들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손과 일처리가 빠른 남편의 평가는 어땠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과거의 나'에 비해 잘 해내고 있는 '현재의 나'를 향한 스스로의 응원이다.


복잡한 생각들을 나열하고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과 거기서 파생되는 또 다른 생각들 덕분에 내가 완벽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지만 신중하게 고려한다는 건 적은 실패와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다. 앞으로 '도시락 매뉴얼'과 같은 여러 매뉴얼들이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나의 불안을 잠재우고 만족감을 줄 것이라 믿는다.




이전 02화봄맞이 대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