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길고 긴 겨울이었다. 유난히 변덕스러웠던 날씨로 인해 4월 말이 되어서야 겨울 점퍼들을 세탁할 수 있었다.
덕분에 큰맘 먹고 계획한 '봄맞이 대청소'도 거리낌 없이 미뤘다. 호텔처럼 집안을 정리하고 사용한 도구들을 소개하는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이 올린 영상들을 보며 '이 참에 나도 해보자'라는 계획을 세웠던 게 올해 1월,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5월이다. 고로 나는 어떻게든 이 계획을 실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엌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중에서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부분을 제일 먼저 해야겠지? 동시에 수납장 표면에 붙어있는 먼지들도 닦아 내야 할 듯싶고. 이왕 하는 거 안에 있는 그릇들도 싹 다 빼고 다시 정리를 할까? 아냐, 눈에 보이는 것부터 정리하자. 그리고 잊지 말고 뒤쪽 베란다 바닥과 냉장고 정리도 좀 하고. 버릴 그릇들도 이번에 싹 다 버리자. 아! 베란다에 있는 수납장도 좀 정리를 해야 하는데. 쓰레기통도 이 참에 바꿀까?
"하, 이걸 언제 다 하지?"
시작도 하기 전에 무언가에 압도되어 기운이 쏙 빠져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은 바빴다. 잠시 청소에 관련된 생각들이 내려놓아지더니 인플루언서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는 '만약 내가 인플루언서가 된다면'이라고 시작되는 가능성 '0 %'의 이야기가 갑자기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무릎을 탁 치는 소리'일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생각들의 가지가 쭉쭉 활기차게 뻗어가는 나의 생각들은 결국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또 다른 생각으로 막은 후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내가 계획한 '봄맞이 대청소'는 단순히 집정리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건강 이상과 육아 등 여러 이유들이 맞물리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한 '전업주부'의 삶이 가치 있음을 증명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오랜 '고심' 끝에 '결심'한) 나와의 약속이었다. 그래야만 나의 상실된 경제적 능력을 보완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그 누구도 심지어 우리 집의 실질적 가장인 남편조차도 나에게 '돈을 벌어오라'라고 하진 않았지만 나에게는 반드시 해내고 싶은 일이었다.
일을 하다가 그만둔 삶에서 가장 괴로운 사실은 내가 스스로 벌어들이는 돈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이다. 경제적으로 무능해졌다는 생각에 뭔가를 사려다가도 괜히 남편의 눈치를 보고 주변을 살피고 있는 나를 마주할 때면 낯설고 서글펐다. 결제버튼이 쉽게 눌러지지 않고 카드를 빼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다.
아무튼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생각들을 겨우 진정시키고 난 후 내가 '봄맞이 대청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뭔지에 좀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이렇게 머릿속이 뒤죽박죽일 때는 적는 게 최고다.
일요목연하게 볼 수 있으니 헷갈릴 염려도 없다. 바로 노트와 볼펜을 꺼냈다. 잡생각을 떨쳐내려면 의지를 행동으로 바꾸어야 한다. 상황을 환기시키는 직접적인 행동은 매우 중요하다.
노트의 빈 공간을 펼치고 청소를 하고자 하는 목적을 적었다. 목적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필요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필요한 과정들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방법이다. 나에게 '봄맞이 대청소'의 가장 큰 '목적'은 전업주부로서 해냈다는 '성취감'을 얻는 것이었다. 따라서 육안으로 드러나는 청소와 아닌 부분에 대한 비율을 적절하게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대청소의 '목표'로는 내가 집안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함으로써 잉여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므로 인테리어적인 요소는 과감히 생략할 생각이었다.
사적인 공간을 여러 사람들한테 보여 줄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인테리어적인 요소는 과감히 생략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하루 할당량과 청소할 장소의 순서를 정하는 일이었다. 정하지 않으면 분명 나는 세세한 것 하나하나 다 완벽하게 해내려 할 것이기에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큰 목표 안에 작은 목 표들를 세워야만 끝까지 해내고 만족할 수 있는 나만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이의 유치원 등원 후부터 점심시간 전까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집안일 등을 마무리한 후 정해진 곳들을 순차적으로 청소하기로 했다.
청소 순서는 부엌과 부엌 쪽 베란다, 거실 및 현관, 화장실, 아이방, 큰방, 옷방, 앞쪽 베란다 순서로 하기로 했다. 막연했던 계획이 구체적으로 세워지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고 설레기까지 했다. 꽤 장기간에 걸진 나의 '봄맞이 대청소', 나도 모르게 세세한 부분까지 너무 꼼꼼하게 할까 봐 걱정도 되지만 오늘 세운 계획표가 나를 잘 이끌어 줄 것이라 믿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열정을 보여준 나의 머릿속 생각들을 차분하게 따라오며 간결하게 글로 정리해 준 '손'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