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썬썬 Nov 25. 2020

그것은 정신병이예요

평생을 한사람만 미워하는 그사람에 대한 고찰 

어떤 한 사람이 있다. 그에게도 남들과 똑같은 하루가 주어지고 아침 밥을 먹고 한가로운 오전에는

집안에 필요한 쇼핑도 정상적으로 한다.

밥을 차리고 매일 틀어놓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딴 일을 하면서도 얼른 메모를 합니다.

겉으로는 너무나 멀쩡하지만 집안에 머물러 있는 그사람의 인성은 같은집에 머무르는 또 한사람에게 

화살을 돌린다. 그 화살은 즉 화 라고 말할수 있다. 상대에 대한 미움

그미움의 대상은 내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저한테는 92세되신 시할머니이고 

일흔이 넘은 시어머니를 내가 시집와서 처음 뵙게 된 그분의 나이는 젊띠 젊은 55세 나이 였다.

얼굴을 보나 행동이나 말을 볼때 뭔가 투명하듯 잘 보이지 않아서 그때 당시 예비 시어머니에 대해 

절대 파악을 할수 없었는데 결혼을 하고 시댁을 자주 들락 거리다 보니 어느 정도 윤곽이 나타났다.

시할머니는 당시 82세 여호와 증인이라는 종교를 40여년을 믿고 있었고 내 시어머니는 

그런 시할머니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50여년동안 무언의 압박이나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있는둥 마는둥 유령 취급 하던 사람이다.


나는 무교로써 어떠한 종교에 휩쓸리지 않고 사람만 보았고 그런 할머니가 안쓰러워 말벗, 장봐주기,

할머니가 좋아하던 그 종교에 조금 관심을 가져보자 하고 할머니와 공부도 하고 할머니 원하시는데로

회관이라는곳도 가끔 같이 다니곤 했는데 그것이 시할머니에 대한 내가 최선으로 할수 있는 마음이였다.


교회를 그렇게 찬양하며 스스로를 자신은 기독교인이라 칭하던 시어머니는 지난 15년간 교회를 단한번도

나가는것을 보지못하였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그 주일날은 시어머니는 맨뱝에 물말아 김치랑 한사발 드시고 낮잠을 쿨쿨 자는일이

그에게는 일이었다. 시아버지도 오랫동안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이단 종교라고 비난하였고 

연세 많으신 할머니를 회관에 모셔다 드릴때면 할머니는 당신의 일흔 넘은 아들의 폭언을 30분동안 

듣고나서야 회관을 가실수 있었다. 


이집에서의 시할머니는 어떠한 존중이나 따뜻하게 어머님, 할머니 라고 불러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저 할머니의 불리우는 명칭은 이단 이단 이었다. 

시어머니는 25세에 시집와서 45세의 시어머니를 맞이했다. 젊었을때의 시할머니도 성격이 대단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세상에 성격없는 사람 어디 있나 싶다. 


종교가 달라서 시할머니를 미워한것인가? 성격이 억척스러운 분이라 미워한것인가?

시어머니는 당신이 받으시는 온갖 스트레스를 종교에 비유해 당신의 시어머니 즉 나에겐 시할머니인

그분을 미워하신것인가? 라고 나는 가끔 생각을 하곤 했다.


시할머니는 당신의 며느리와 아들과 살면서도 혼자 밥 지어 드시고 숨거두는 날까지 여호와증인의

파수대를 오전에 전파하시고 저녁에 숨을 거두셨다. 


사실 많은 옛 할머니들은 60만 넘어도 며느리나 아들이 밥을 해다 줘야하고 애기 처럼 돌봐줘야 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 시할머니는 단한번도 며느리나 아들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두발로 다니며

해야할것들을 다 하고 다니셨다. 


하루는 시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어디에도 이런 할머니 없어요. 어디 아픈데 없고 건강하시고 

연세 있으셔도 때되면 자매님들과 포교 다니시고 그냥 할머니가 즐기는거라고 인정해주세요.

그 종교가 싫다고 해도 총칼들고 사람을 위협하거나 나쁜것을 행하지 않는거잖아요.


물론 그 종교의 교리 깊이 들어가면 말도 안되는 것들도 몇가지 있지만 믿지 않는 가족들에겐

해당사항 안되니 정말 미워할일이 없는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종교를 믿다가 깨우쳐서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그만 믿는것이고 그 종교에 너무 심취해서 못빠져 나오면 

어떻게 인력으로 할수 없는것이다. 


50년동안 종교싸움을 하고 시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일생을 받쳐 시할머니를 몰입해 미워했다.

그결과 시어머니는 자식을 잘키웠다고 하지만 그 아들 둘다 정서불안이 없지 않아 있다.

그것을 알리 없는 시어머니 그런 아들과 결혼한 나는 가끔 알수 없는 남편의 욱성질에 가끔 공포에

질린다. 그영향은 3대인 우리집 아이한테도 큰 영향이  있다. 


아무튼 할머니는 2년 반년전에 하늘나라로 가셨고 시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종교전쟁 이제야

끝났네 하며 기쁨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의 관이 땅속으로 들어갈때 내머리속을 뭔가 스쳤다. 다음은 네 차례야.

다음은 네 차례야 말은 시어머니가 평생미워 하던 대상이 없어졌으니 다음 미움의 대상은 너이다.

라며 나의 뇌리를 스쳤다. 너무 가슴깊이 박혀버린 그 환청을 떨쳐낼수가 없었다. 


나와 시댁은 4시간 거리에 살아 내가 가지 않으면 서로 만날 이유가 없지만 어느날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남편없이 시댁을 방문했다가 시어머니가 우리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내거나 너 꼴보기 

싫다는 행동을 보게 되면서 아이를 데리고 얼른 그집을 빠져 나왔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시어머니는 이미 정상이 아님을 알게된건 오래전이었다. 너무나 좋은 집에 살면서 

집안에는 온갖 쓰레들이 많다. 집안에 발을 디딜틈없이 쌓아놓은 저장강박증은 어느 한사람도 

그것이 비정상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고 팔이 안으로 굽듯이 자기들 서로 서로를 감싸주었다. 


며느리로써 집안을 허리가 무릎이 나가도록 열심히 물건 정리를 해도 쓰레기를 다갖다 모아 놓던

시어머니다. 그러던 말던 신경쓰지 말자가 아니라 언제부턴가 나는 시어머니에게 나라는 사람은 

욕받이나 미움이 되상이 되었던 것이다. 여호와 증인 시할머니가 죽음으로 사라지자 

누군가를 미워해야 자신이 살수 있는 사람처럼 시어머니는 평생 반찬 투정 했던 시아버지가 

아닌 며느리인 나를 타깃으로 삼았다. 


나는 얼른 그 관계를 끊어 버렸다. 사실 둘째 며느리라고 은퇴 목사 딸이라고 시집을 왔다.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교회를 좋아했던 시어머니는 별볼일없던 둘째아들의 결혼에 큰아들과 큰며느리인 나를 

차별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늘 입에 달고 살았다, 별 볼것없는 xx 뭐 가진게 있냐xx. 

둘째 며느리도 시집올때 아무것도 없이 여행가방 들고와서 시부모님 소유 콘도 아파트에 살림을 차렸다.


그사람도 별것없는 사람인데 왜 큰며느리만 미움이 되어야하는지 사실 나는 잘 알것같다.

시어머니는 정신이 아픈사람이다. 이글로 표현할수는 없지만 사실이 그렇다. 

한때는 그런 시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렸했고 재밌는 농담도 해가며 많으 웃으시도록 했다.

현실은 둘째아들과 둘때 며느리에 꽂혀서 큰며느리는 그저 미운 오리새끼 일뿐이다. 


하지만 평생을 못되게 살아온 시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마흔 넘어 갑자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 안에서 챗팅으로 만난 여자와 속전속결로 아이부터 갖고 속도위반 결혼을 했다.

요즘 세상에 혼전임신이 문제가 되진 않지만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평생을 분위기 조성하고

같이 있으면 불편한 표정으로 꽁 하고 있던 시동생의 변화는 그닥 달갑지 않았다. 


종교 전쟁이 끝났다고? 그 미움이 사라졌다고?

시부모님의 둘째아들로 인해 기독교 전도는 시작 되었다. 

평소에 어떻게 크고 자라는지 우리집 아이에 대해 전혀 관심 없다가 아이 생일에 

성경책을 선물로 보내는가 하며 오로지 주만이 존재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건 알겠다. 내가 믿는 종교와 다르다고 사람을 평생 

미워하며 가족내에서도 기독교가 아니라서 교류를 못하니 빨리 전도 해서 자신들과

같은 레벨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과 그들의 이념을 나는 받아들일수 없다.


종교전쟁이 끝난것이 아니라 끝났어야 할 종교전쟁과 사람에 대한 미움은 이제 

다시 시작 된듯 하다.  


상대를 미워하지 않되 나는 그들을 대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왜냐면 종교를 떠나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미워하는 대상이 없어지는 순간 또다른 먹잇감을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머져리들에게 먹잇감이 될수도 없지만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교류를 끊는것이 최선

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를 미워하는건 내 인력으로 할수 없지만 다같이 주어진 시간에

내가 하고싶은것을 타의에 의해서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용서 할수 없는것이다. 


모든 사람은 매일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을 누릴 권리가 충분 하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