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쌀국수 [소울푸드 ]
음식에게 내마음을 모두 내어 주었다.
프랑스로 유학을 온지 3개월째 되던 날 몸과 마음을 시리게 했던 고약한 추위는 물러가고 따듯한 했살이 겨울잠바에 살며시 내려앉을때 봄이 왔음을 알았다. 프랑스의 4월 끝자락과 시작되는 5월 첫주는 조금은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햇살 풍년이 내리찌던 오전 11시는 마치 내 마음을 다 이해해줄것같은 마음이 따듯한누군가를 만난것 같았다.
봄이 시작되긴 했지만 조금은 이른것일까? 따듯한 햇살이긴 해도 겉옷을 벗을 많큼 그것을 신뢰하지 못했다.
아는이 하나 없는 프랑스 파리의 중심 14구 Daguree Rue 동네 위치한 4층 건물에 스튜디오 원룸을 얻어 지냈다.
프랑스에서 유학해본 이들만 안다는 유학생 방 들의 실체는 멋진 주택 건물 안쪽에 0층에 위치하거나 건물 5층 일명 옥탑방들은 곧 하녀방이라고
불리운다.
프랑스에서는 1층이라는 개념이 없고 0층 분류되는데 엘레베이터도 없고 에스카르고 골뱅이 처럼 뱅글 뱅글한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꼭대기층의 5층이나 0층은 여름엔 창문이 있어도 덥고 겨울엔 발이 한발짝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춥다.
사실 날씨가 춥던 덥던 내가 하녀방에 살던 그런것들이 중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내 나이가 이제 마흔살이 넘어서 생각이 드는게 10대,20,대 오롯히 나로만 살다가 누군가를 위해 밥을 하고 그 밥을 해대는 그 나날들 속에 크고 작게 부딫혀야만 했던 감정들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사람이 아닌 따뜻한 햇살에도 절대 내 마음을 내어 주지 않았다. 사람도 자연도 신뢰할 지경이 못되다 보니 내마음을 어디에다 기대야 할지 숨을 쉴수가 없었고 가끔은 내 자신이 작은 박스에 들어가 갇혀있는 느낌이 들어 헤어나오지 못하고 마냥 죽고 싶다.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적있고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늘 형상화 했다. 그런 그 모습을 내스스로가 보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만약 소파에 앉아있고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티비라는 물체를 보고 있는데 티비가 죽고싶다고 스스로에게 끈을 묶고 있는것을 제3자로써 내가 보고 있었다면 그 죽고 싶은 티비에게 뭐라도 한마디 해주고 그 심리를 알아채고 다독여주며 달래주었을것이다. 우리 같이 함께 하자 내손을 잡아 라고 그마음을 달주었을것이다.
불행하게도 내 주변엔 그렇게 말해줄 만한 사람이 없다.내가 아프면 아픈거지 그 타인들이 아픈건
아니니 남들이 절대 내속을 내마음을 알아줄수
없다. 그것이 감기나 두통이 아닌 내적인 마음의병이고 정신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나만 더 힘들다는 말이다.
어릴적 부터 나는 강박을 알았고 스무살이 넘어서도 내가 왜 자꾸 숫자를 계속 세는지 닫았던 문은 왜 또 열고 닫고를 하는지 그것을 인지를 하면서도 그 반복에 대해 알수가 없던것이 나는 나의 강박을 숨긴적은 없으나 어느 누구하나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원인이 왜 그런지 찾아볼 생각도 못했지만 그것이 강박증이라는것도 알수없었기 떄문이다.
내스스로 뭔가 내 의지에 상관없이 자꾸 반복하는 행동에 피곤함을 느껴 의문을 가지고 내 스스로를 관찰하는 기록을 썻고 비슷한것들을 찾고 책을 읽으며 그것이 강박이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의문을 같고 실행하는건 절대 쉽지 않았지만 나에게 의문을 갖고 계속 하다보니 답을 찾게 되었다.
나는 강박증을 가지고 20대를 보내기는 했지만 자라나는 동안 우울하거나 자존감이 낮아진다거나 죽고싶다거나 하는 심리를 가진적이 없다. 청소년기도 무난하게 지나갔고 한 두명의 친구만으로도 재밌게 지내고 때론 친구가 없더라도 그동안 미루고 시도하지 못한것들에 대한 갈망이 많아 그것들을 해내 느라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오랜 외국 생활로 몇 안되는 오래된 친구와 못만나게 되고 자연스레 나이가 들어 좋은 사람 만나 결혼을 했다. 누구나 그렇듯 신혼생활도 재밌고 10년동안 아이 없이도 둘이 오붓하게 지내며 아내로써 해보지 못했던 요리들도 뚝딱 만들어 내며 누구보다 모든일에 자신감을 뿜어내던 때였다.
나이탓일까? 아니면 청소년기부터 시작된 외국생활에 신물이 난것일까? 원인은 모르겠으나 기분이 다운 될때는 내가 좋아하는 면 종류의 음식을 먹으러 외식을 하곤 했다.
나는 고기,야채,밥 보다 면이 좋다.
이세상의 모든 종류 상관없이 면을 좋아하고
그것들을 삼시세끼먹는다.
때론 간식으로 면 요리로 배를 채웠다.
하지만 내나이 서른쯤에 이제 면도 지겨운것일까?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권태기도 올만한 결혼 17년차이지만 하하 호호 웃는 날도 있었고 남편과의 의견대립에 때론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댁 식구들의 개입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받는 스트레스는 내 자존감을 곤두박칠 치도록 끌어내리곤 했다.
우리는 자라면서 웃어른에 대한 공경에 대해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배웠다.
나는 싫은사람과 한 공간에서 지내거나 어쩔수 없이 매일 봐야하는 그런 관계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보았다.
그들 특히 시댁으로부터의 차별이나 친정엄마에 대한 심한 말로 공격을 받았을때의 상처는 절대 치유되지 않고 잠시 내가 생각을 접어둔것이어서 입박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연타로 공격을 받거나 손 아랫 사람이라고 윗사람이 나보다 또는 직위가 높은 상사나 시부모라는 벼슬에 앉아 있는 입장에서는 을의 입장인 며느리에겐 상당한 감정적인 못질을 해댈때 마다 우리가 편하게 부르려고 만들어낸 호칭을 되세겨 봤다.
회장님,사장님, 대리님, 실장님 그리고 시어머님, 시아버님,그리고 도련님 그외의 시댁 어른들을 칭하는 단어들 그런 단어들이 나를 꽁꽁 메어두는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난 사실 언제부턴가 시어머니, 시아버지라는 호칭을 부르지 않고 내 마음도 함께 내려놓았다.
내려 놓기 전에는 그분들의 차별, 부당한 인간대우, 대화를 할때 녹음을 해놓지 않으면 안되는 대화, 며느리 험담에 대해 갑의 갑질에 을의 입장인 며느리로써 오롯히 내탓이 되는 모든 말,말,말 들을 들으며 혼자 결혼 생활 내내 감내 해야했고 시댁어른들에 호칭을 내려놓기까지는 많은 연습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전에는 아버님 식사하세요 라고 말했다면 오셔서 식사하세요 라고 하거나 전화 통화가 길어질쯤에는 제가 다음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라고 부담없이 말하되는 신기한 방법을 알게되었다.
상대방의 무례한 말을 듣게 되도 호칭을 안부르니 무례한 말에도 예의있고 단호하게 대처를 하게
된다.
아무래도 호칭이 있다면 나는 아랫 사람으로써
분명 주눅이 들고 상대방으로부터의 비난 하는
말을 들어도 내 속앓이만 하고 우울증으로 번지게 된다.
우울증이 생기면 그떄부턴 내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이세상에는 사람과 음식은 넘쳐난다.
이렇게 많은 음식이 있는 이유는
내게 맞 약을 찾는것과 같다.
약국에서 지어주는 약만 약이 아니다.
흔한 음식이지만 나를 살리고 내 영혼을
달래주는 음식은 꼭 어딘가에 있다.
그 음식을 먹으면 곧 살아난다.
난 그렇게 하루하루를
일주일을 한달을 견디며 산다.
나는 베트남 쌀국수가 그렇게 좋더라.
타인들의 말한마디에 발끝가지 내려간 내 자존감은 희안하게도 베트남 쌀국수 한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웨이트레스가 금방 가져다준 뜨끈한 쌀국수에 제일 먼저 아무것도 넣지 않은채 국물 한술 떠 먹으면 언제 기분이 그랬나 금방 풀린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실란트로 (고수 나물) 듬뿍 넣고 핫소스에 매운 할라피뇨를 얹어 먹으면 한그릇 뚝딱인데 캐나다에서 하이스쿨 다니면서 처음 먹었던 베트남 쌀국수를 이토록 오랫동안 먹을줄 몰랐고 자주 먹는 음식으로 내가 먹는 것중에 한끼정도 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내인생의 고비를 말하자면 이책의 다른 페이지에서 거론했던 나의 프랑스에서 유학기와 늦둥이 아이를 출산하고 산후우울증을 겪을시 였다.
사실 이 이야기는 진지하게누구에게 말 해본적도 말할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 아이출산후 산후우울증걸렸던 내 자신을 생각 해보면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집으로 왔을떄도 집에는 챙겨주는이 하나
없이 오롯히 나와 태어난지 4일된 아기 뿐이었다. 그렇게 독박육아를 지냈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할떄는 3개월간 어느 누구와 대화를 해보지 못했다. 파리 시내 길거리에 사람이
넘쳐나도 내가 사는 집 건물에도 사람을 만날수
없었고 어쩌다 같은 건물에 사는 프랑스인을 보면 봉쥬르 하며 이사도 건네곤 했다. 그렇게 어느날
문득 외롭다고 느껴질때 내가 사는 집앞에는 파리 14구에서 유명한 재래 시장이 있고 늘 지나다니던 그골목에 베트남 사람들이 파는 쌀국집에서 한끼를 먹었다.
파리에서 유학하며 내가 떠나온 본 집에가고
싶어질때면 늘 그곳에 들러 쌀국수를 먹고 나면 일주일은 힘내며 살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살아간다. 가끔은 편두통으로 고생 할때도 쌀국수를 먹고 푹 자고 일어나면 그렇게 개운할수가 없다. 사실 내가 쌀국수를 먹으며 위로를 받고 그 음식이 나의 소울푸드가 되기까지는 내스스로도 많은 방황을 해야했다. 어릴적 엄마가 해주던 엄마의 손맛이 들어간 계절 음식을 먹으며 행복했고 자라서도 그영향으로 건강하게 20대까지 아무 걱정없이 살다가 결혼후 부터는 사먹는 김치가 너무 맛이 없다고 느낄때 내가 이걸 왜 먹고 있나 울었다.
그것이 곧 우울증이 었던 것이다. 울면서도 사실
김치 탓이 아니라는건 내가 더 잘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가 그리웠던 것이다.
외국에 살면 계절음식은 커녕 신선한 생선을 사려면 중국마트나 가야하고 대부분의 식재료는 냉동이 많아 같은 동태전을 해먹더라도 어릴때 먹던
그맛이 절대 나지 않는다. 결혼하고 마흔이 되었지만 아무리 잘먹어도 서른나이때부터 알수 없는
알러지나 두통에 시달리다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계절음식을 안먹어서 그런가보다 라며 내 결론을 내렸다.
마냥 음식 타령 음식 탓만 할수 없는것이다.
매번 다짐하는것이지만 음식도 가려먹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가려 만날려고
하지만 우리 삶에서 사람을 전혀 안만나며 살수는 없고 무엇보다 사람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땐 나는 좋아하는 음식 쌀국수 먹으며
스스로를 위로 한다.
지난날을 그렇게 살아보니 산해진미를 맛보고
온갖나라의 음식들을 먹어봐도 나를 위로해주는 음식 한가지라도 찾았다면 아무리 힘든일이 있어
죽으려고 마음먹을때 문득 생각 나는 그거라도
먹을까 라는 생각에 그 작은 힘에 힘입어 극복할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세상에 똑같은 불고기집이 있는 이유는 그만큼 천가지 만가지 다 다른 식성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에 그런 식당들이 다 존재하는것이다.
나는 내가 마음이 힘들어 못일어날땐 꼭 베트남
쌀국수 생각한다. 나를 가끔 찾아오는 우울증을
이겨내는 내 방식중의 하나이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