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렴풋한 기억으로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4 식구가 방 두 칸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첫 끼니를 먹던 장면은 30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내 나이 7살쯤 되었을 때 엄마는 저녁으로
꽃게탕을 만들어 오셨다.
식탁이 아닌 온 가족이 둘러 바닥에 앉아 먹어야 하는 둥근 은색 쟁반에 밑쪽으로 얇은 다리네게로
구성된 작은 밥상이었다.
요즘은 80년대의 은색 쟁반에 꽃무늬가 그려진 둥근 밥상이 추억으로 되버렸지만 우연히라도 티브이에 나오는 그때의 그 밥상을 보면 그렇게도 그 시절이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두 번의 사업 실패를 하시고는 완전 폐배자가 되어 못 먹던 술을 드시면서 완전히 인생을 놔버린 듯했다. 시골 출신인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와 대구 출신인 서울에서 자란 엄마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어린 내가 볼 땐 엄마 아빠는 성격이 전혀 맞지 않았다. 9세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엄마는 20 초반의 나이로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나를 낳았다.
너무 오래된 일이고 내가 어린 나이였어도 그때 당시는 아버지가 언제 또 밥상을 업을지 늘 불안을 안고 살았다 조용한 날일 것 같으면 자금을 대준 외할머니께서 오셔서 아버지에게 돈을 갚으라고 닥닥을 하고 갈 때마다 아버지는 그 화를 우리에게 풀었다.
그 후로 할머니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조차 싫었다.
나의 외할머니는 80년대에 보기 드문 뚱뚱하고 10손가락 중에 알이 큰 옥반지에 두꺼운 금반지를
최소한 너 다섯개는 끼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누가 봐도 부잣집 할머니였다.
80년대에 신림동에 위치한 외할머니댁에 가면
2층 집 주택으로 들어가는 골목도 깔끔하고
서울이지만 집집마다 감나무, 석류나무 등이
담장을 넘어 길쭉길쭉하게 높이 뻗어 부잣집 동네를 직감하게 만들었다.
그런 부잣집 할머니의 돈을 가져다 쓰고 사업이 망한 아버지는 숨을 쉴 수 없도록 온갖 비난을 받았다. 엄마는 없는 살림에 정성 들여 밥상을 차렸고 아버지는 이틀에 한 번씩은 저녁밥상을 엎었다.
즐거워야 할 저녁시간은 손쓸 수도 없을 만큼 난장판이되었고 방안은 널부러진 음식들로 엉망이었다. 어린 나이에 공포감을 느끼다 못해 무덤덤해지기까지 했다. 그 후로 아버지를 피해 내 여동생과 작은방으로 피했고 동생과 조용히 앉아 숨을 죽이고 있을때 아버지는 살림을 더 때려 부셨다. 엄청난 굉음 소리가 들리고 엄마를 때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후로 엄마와, 나, 내 여동생은 주변의 어떠한 보호도 없이 동이 틀 때까지 맞아야 했다. 그런 일이 번번이 일어나면서 나는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우리를 도와달라 요청을 했다. 경찰들이 집으로 왔을 때 집안을 들여다보던 경찰을 보며 어린 나이지만 부끄럽고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경찰이 왔으니 모든 게 정리가 될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경찰들은 부부간의 싸움이라며 아무런 조치도 없이 돌아갔다. 경찰이 돌아가고 나서 나는 아버지가 더더욱 무서워졌고 이 난관을 어떻게 해야 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 나이 고작 7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고 12살이 되었을쯤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일본으로 갈 준비를 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나려면 기간이 좀 많이 남았어서 한국으로는 언제 돌아올지 몰라 엄마는 정성껏 우리에게 맛있는 저녁을 해주었다.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조갯살을 넣은 된장찌게 그 된장찌게는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쯤 온 동네에 퍼져 나의 배꼽시계를 울렸다.
그렇게 음식 냄새가 내 작은 코를 자극할때면 해가 이웃집 지붕 뒤로 석양을 비추며 서서히 내려갔다.
자식은 마음데로 안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내 부모가 마음데로 되지 않았다
자식은 좋은부모 나쁜부모를 선택 하며
태어날수 없고 나쁜 부모를 만난 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그런 폭력 가정에서 자랐다고
나쁜 아이라고 낙인찍는
어른들말에 받는 상처는 이루 말할수 없다
해가 내려가는 그 시간은 저녁 먹을 시간이 됬다라는 걸 안다. 하루는 동네 친구들과 한참 놀고도 다들 집에 가고 없는 텅 빈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지는 노을을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어둑어둑 해졌다. 그날은 왠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늘 불안정했다. 불한정한 가정에서 살얼음판을 걷듯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조금 아니 많이 버거웠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족으로써 행복한 저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작은 집으로 옮겨진 첫날 엄마가 힘겹게 만들어온 꽃게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 네 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옹기종기 모여 저녁을 먹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 재료로 밥상을 차렸다. 엄마가 손수 만들어준 음식으로 그동안 건강하게 살았다. 엄마를 따라 일본으로 이주하고 후에 내가 더 자라서 한국이 아닌 미국에 살게 되고 엄마의 손맛이 담긴 음식을 안 먹고도 잘 지낼 줄 알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고 있고 부족함 없이 먹고 싶은 거 다 먹고살고 있어도
엄마와 살 때보다 아픈 날이 많다.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20년 정도 못 먹어 본 것 같다. 엄마의 사랑이 듬뿍 담긴 따뜻한 밥상 말이다.
나는 셰프가 되어서 플레이팅을 정성스럽게 완성하여 손님에게 내어놓을 때 엄마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한테도 내가 만든 요리를 먹여주고 싶고 내손으로 밥 한 끼라도 해주었더라면 하고 지난 후회를 해보지만 엄마는 이제 내 곁에 없고 엄마의 음식은 더더욱 맛볼 수 없다.
유난히도 외가댁의 외할머니와 우리 엄마를 포함해 유전적으로 앞머리의 숱이 없다. 그래서 엄마는
젊은 나이에도 앞머리 가발을 쓰고 다녔다.
어린 기억으로는 아버지한테 맞으며 머리를 뜯긴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 엄마는 숱이 많고 반짝거리는 나의 검은 나의 머리카락을 그렇게 부러워
하셨다.
그땐 너무 철이 없어 내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게 너무나 한이 되었다.
나는 늘 허리까지 오는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유지하였고 머리를 싹둑 자를 때는 미용실에 그냥 버리고 오곤 했다.
한해 한해 지나면서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엄마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은것에 대한 자책
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엄마는 나를 키우며 힘든 상황에서도 매 끼니마다 밥상을 뚝딱 차리 셨고 오롯히 자식을 돌봐주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이 너무 무색할 정도로 엄마를 전혀 챙기지 못했다. 엄마는 하늘나라에 다른 우리 가족은 서로 뿔뿔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세월이 흘러도 내 가족은 늘 그리운 존재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