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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국경도, 언어도 없었다

by 최용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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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나는 대한민국 휠체어농구 국가대표팀의 코치 자격으로 IWBF 아시아 오세아니아 챔피언십(Asia Oceania Championships, AOZ) 무대에 섰다.
이 대회는 국제휠체어농구연맹(International Wheelchair Basketball Federation, IWBF)이 주관하는 세계선수권 진출권이 걸린 공식 예선전으로,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의 최정상 팀들이 모이는 경기다.
한국을 비롯해 호주, 일본, 이라크, 이란, 중국, 태국, 필리핀,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총 12개국이 참가했다.


첫날, 나는 선수들과 함께 코트에 섰다.
국기를 앞세워 입장하는 대신, 가슴에 새겨진 태극마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마크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지금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구나’라는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휠체어의 바퀴가 코트를 밟을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무대에 오기까지 수많은 새벽 훈련과 재활, 그리고 마음속의 싸움을 견뎌야 했다.
선수뿐 아니라 코치인 나에게도 이 대회는 ‘시험대’였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건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정신, 태도,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까지 모두 경기의 일부였다.


각국의 코치들과 처음 인사를 나눌 때, 서로의 언어는 달랐다.
하지만 눈빛은 같았다.

“Good luck.”
“See you on the court.”
짧은 인사 속에서도 서로의 진심이 전해졌다.
언어의 장벽은 있었지만, 스포츠는 언어를 초월한 가장 인간적인 소통이었다.
경기 중에는 전략을, 경기 후에는 경험을 나누며 서로에게서 배웠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한 이라크 코치가 내게 다가와 손짓으로 골대 쪽을 가리켰다.

“슛 한번 던져보라”는 제스처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농구공을 잡았다.
슛을 던지는 순간,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림을 통과해 깔끔한 클린슛으로 들어갔다.
이라크 코치는 두 번의 시도를 했지만 모두 림을 살짝 빗나갔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동시에 외쳤다.
“Good! Good!”
언어는 달라도 웃음은 같았다.
그 짧은 교류 속에서 나는 이 대회의 진짜 의미를 느꼈다. 경쟁 속에서도 우정과 존중이 존재한다는 것.


그 장면은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외모도, 언어도, 종교도 달랐지만, 휠체어농구를 통해 모두가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이었다.

누군가는 전쟁 중 다리를 잃었고, 누군가는 교통사고로, 또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장애를 핑계로 삼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코트에 쏟아부었다.
그들의 바퀴 자국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삶의 흔적이었다.


경기 도중에는 뜨거운 경쟁이 펼쳐졌다.
국가대표라는 이름 아래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휠체어가 부딪히고, 공이 튀어나가는 순간에도 모두의 눈빛에는 ‘존중’이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서로의 손을 맞잡고 “Good game.”이라 말할 때,

그 짧은 한마디 안에는 패자의 아픔과 승자의 겸손,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 함께 담겨 있었다.


선수들이 서로를 껴안던 순간,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한 가지를 보았다.
‘우리가 해냈다’는 기쁨보다 더 큰 감정, 바로 “우리가 서로를 믿었다”는 확신이었다.
그 믿음이야말로 스포츠의 본질이고, 팀의 힘이었다.


나는 체육관안에 걸려진 각국의 국기를 바라보았다.
국경은 지도 위에만 존재했다.
코트 위에서는 오직 노력과 열정만이 우리를 구분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것이 세계무대에서 진짜 배워야 할 태도라는 것을.


휠체어농구는 나에게 새로운 사전을 선물했다.

‘장애’는 한계를 뜻하지 않았다.
‘경쟁’은 적대가 아니라 성장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국가대표’는 책임이자, 더 큰 세상과 연결되는 다리였다.


2025년 AOZ 대회는 단순히 한 번의 대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양성 속의 연대, 차이를 넘어선 존중,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를 보여준 살아 있는 교과서였다.
나는 앞으로도 이 경험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휠체어농구는 바퀴로 굴러가지만, 결국 사람의 마음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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