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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wkey Apr 12. 2023

4.첫눈에 반한 사랑, 그것이 남긴 상흔에 대해(2)

왜 강렬한 사랑의 감정은 파국으로 끝이 날까?

(이전 편에 이어서 계속)


 

융은 남성 내부의 아니마의 강화가 부정적으로 발현되는 경우에 아니마는 대개 심술궂고 악의에 찬 행동, 상대에게 비방을 일삼는 행위, 지나친 감상주의자나 예민성 등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예민한 특성과 유약성, 화를 잘 내거나 신경증적인 측면, 자발성의 결여로 결단에서 우유부단한 점 등. 유약함과 신경증, 우유부단함 등은 얼핏 방어적인 기제 같지만 여기에는 항상 값싼 진실의 왜곡이 있고, 미묘한 파괴성이 있다. 아니마의 이와 같은 특성은 개인에게 콤플렉스로 작용하며, 가장 개인적인 삶부터 파괴시켜 간다.


'융'은 술을 많이 마시는 태도모성애에 대한 그리움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에 많은 잘못을 해놓고서도 어머니의 품에 안기면 모든 것이 덮어지거나 용서되었던 것처럼 술을 자신의 잘못을 문제 삼거나 비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감싸주고 무마해 주는 수단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과 과오 혹은 결핍을 덮고 싶을수록, 더 이상 어머니에게 회귀할 수 없는 이 남성은 술을 통해 돌파하려고 한다.


결국 어느날부터 그는 하나씩 주변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거리두기 시작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금주를 위해 시작했던 운동을 멈추었다. 이어서 글 쓰기를 멈췄다. 수족관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가쁘게 몰아쉬던 영화에 대한 열정이 멎었다.


이윽고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을 날카롭게 밀어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의 과오를 조목조목 따지며 합리적으로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고자 했다. 그간의 인내에 대한 보상이라도 바라는 것처럼 그를 몰아세웠다. 점차 서로에게 추해졌고 포악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 세계 위에서 위태롭게나마 발붙이고 있던 우리들의 작은 세계를 스스로 지웠다.


계절이 바뀔 때, 손끝이 시려워서 주머니에 숨겨야 할 때쯤이 되면 그가 이따금씩 생각난다.



첫 눈에 빠지는 사랑은 높은 확률로 파괴적인 귀결로 이어진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아가씨>의 대사처럼, K는 아마도 붕괴되어 가던 자신의 일상 속에서 나를 만났을 때 마치 내가 구원자처럼 느꼈졌을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나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의 모든 혼란과 절망을 수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내 안의 억압된 아니무스가 변덕을 부리기 전까지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작용할 때 우리는 환상에 빠지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가령 매력적이고 신비스럽게 보이던 나의 연인이 실망감과 고통을 안겨주는 괴물로 변할 때, 상대방의 인간적인 결함을 보면서 사랑이 식음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나의 결핍에서 비롯된소망과 동경을 상대에게 투사하도록 내 안의 아니마/아니무스가 부정적으로 작용한결과이다. 투사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를 '투사'함으로써 상대에게서 찾고자 할 때, 결국 관계에는 상흔이 남게 된다.


첫 눈에 반하고 낭만적인 관계가 이어지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사려고 말과 행동으로 노력한다. 그로면서 겹겹이 가려져 있던 사회적 가면을 하나씩 서로 벗어간다. 맨숭한 민낯을 서로에게 보여주더라도, 도리어 이 모습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낭만을 이끈 것은 아마도 아니마의 힘이었으리라.


하지만 아니마에 의한 관계의 낭만이란 지극히 변덕스러운 것이다. 낭만 안에 깃든 파괴력과 폭력성 역시 아니마의 힘 아니던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내 소망을 상대에게 투사해 찾고자 할 때, 화들짝 경계하며 이를 멈추고 그 지점에서 자기 의식의 어두운 면을 발견해야 한다. 그 사람에게 내가 열렬히 기대하고 요구했던 바가 사실은 내 억압된 인격의 결함과 결핍이었다는 것. 오히려 상대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면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다는 것. 그렇게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무의식의 인격,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우리는 이를 통합하고 온전한 전체 정신에 도달하여 내적 성숙을 이룰 수 있다.


절대 자기 혼자 상수리 나무 아래 가부좌 틀고 앉아서 내적 성숙을 이룰 수는 없다. 나의 페르소나, 나의 가면을 망가뜨리러 온 가장 가까운 타인. 그를 만나기 전 나 스스로 통합시킨 내 인격의 입장에서는 침입자나 다름없을 그 한 사람. 그러나 그와의 마주침을 통해 내적 성숙을 이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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