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많이 필기하고, 생각하며 읽은 책이다. '철학 카페~'로 시작하는 제목의 책이라 부담없이 외출했다가 그곳이 그냥 카페가 아니라 스터디카페라는 걸 알아챈 기분이랄까. 레퍼런스가 되는 여러 문학작품 중 단 하나도 제대로 읽은 것이 없다는 부분은 문학 전공자로서 반성할만한 부분이었다.
뭣이 중헌디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기에 오히려 의미가 있다. 삶에는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난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라도 삶에는 의미가 주어져야 한다.
실존주의나 존재론적 권태론 부분에서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이 잠시 든 것도 사실이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부조리가 '삶의 이해할 수 없음'이라면, 내가 생각하는 철학이론 중 실존주의가 바로 '이해할 수 없음'의 테두리에 들어가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존주의를 나의 '부조리'라고 감히 칭하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었다. 이해는 되지만 공감은 하고 싶지 않은 정도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같은 난해할 수 있는 작품을 흥미롭게 느끼게해준 것 역시 실존주의였다.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존재가 연극 배우이자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순간은 긴 여운을 준다. 문학과 철학과 커피를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여운 때문이리라. 뭣이 중헌디? 더는 묻지 않고 여운을 느껴기로 한다.
젊은 오십견 환자를 위해
대학교 시절 철학과 오리엔테이션 수업을 청강한 경험이 있다. 첫 시간부터 산만한 움직임으로 강의실 양 끝을 왔다갔다하며 두서없이 하이데거 이야기를 늘어놓는 강사님을 보면서 친구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철학이 제일 시급한 사람은 바로 저 교수님인 것 같아"
나는 철학을 인문학의 나침판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철학은 오히려 방향을 잃을 기회를 주는 학문이었다.
한 각도로 반복된 일을 하다 보니 젊은 나이에 오십견이 왔다. 몸의 오십견도, 사상의 오십견도 치료가 필요해졌다. 굳어 있는 모든 것은 죽어간다. 벗어날 수는 없지만 벗어난 듯 살아가리라. 책장을 덮으며 다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요? 부조리에 대한 대처 방안이 없다는 말인가요? 우리는 그저 무의미한 세계에서 무의미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는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오직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반항'이지요. 그리고 '반항'을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김용규 지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