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꾿빠이, 이상>을 읽었다. 이상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읽기 어려웠던 소설이자 전기였다.작가의 '진짜' 의도를 알고 싶지만, 오독의 재미를 위해 내가 했던 생각들만을 적어보았다.
문학론인가? 생각하며 읽다가 철학서인가? 생각하며 읽다가 '가짜 뉴스'를 풍자한 사회 비판서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철학적 고민과 인생의 역설을 '이상 시인의 덕후들'의 이야기로 풀어낸 소설이 아닐까. 책에 대한 나의 짧은 인상이었다.
#1 문학이냐 저자냐
대학시절 국어국문학을 복수전공하면서 문학 작품을 해석할 때 무엇을 중심으로 두느냐에 따라 작품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배웠던 것 같다.
작가의 삶을 배재하고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한 예술적 가치를 판단하는 것, 문학 자체가 결국 저자의 분신이므로 저자의 삶과 다른 작품들을 바탕으로 문학을 해석하는 것. 어느 방향으로 해석의 주안점을 둘 것인지의 문제지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51대 49로 섞을 수도 있고, 49대 51로 섞을 수도 있다. 덕후라면 자고로 작가를 51% 이상으로 고려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더욱 애매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데드마스크와 오감도 제16호는 49대 51로 진짜일 수도 있다고! 그럴까?
#2 진짜냐 가짜냐
책을 읽다 보면 미디어의 가짜뉴스 논란이나 오래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모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이 떠오른다. 세상은 진실보다 의혹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늘 모호하다.
[교육방송의 마스코트 펭수가 길에서 휘청이며 걸어가는 뒷모습은 알코올중독인 것으로 밝혀져!]라는 논란의(?) 뉴스가 있다. 펭귄 탈 안의 진짜 펭귄인 펭수는 진실을 밝혔다.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리는데 무거워서 걸음이 휘청휘청했어요.
#3 권위냐 반권위냐
우리는 종종 영웅 전기(傳記)의 오류에 쉽게 빠진다. 불멸의 업적처럼 영웅을 완전무결한 존재로 이상화하거나, 이상화를 위해 사실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그 유고를 없앨 자격이 어디에 있단 말이오? 그것까지도 이상의 본모습이 아니오?" 와타나베가 팔을 내저었다. "아니지요. 그건 선생이 추구하던 이상의 모습이 아니지요. 선생이 진정한 추종자라면 그 원고는 포기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상 문학은 영원할 수 있습니다." p.188
정말일까? 그건 모르겠으나, '목소리가 클수록 권위는 높아지(p.125)'는 세상에 살고 있음은 알겠다.
#4 운명이냐 자유의지냐
이상은 천재다. 그의 작품을 보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천재로 태어난 건 운명이 아닌가.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의 슬픈 삶도 결국 운명이 아닌가.
하지만 김해경은 운명의 지배를 받아도, 김해경이 만들어낸 '이상'은 자유의지로 만든 존재였다. 그의 죽음은 운명이었을까 자유의지였을까. 김해경의 죽음이라면 운명, 이상의 죽음이라면 자유의지일수도 있을까.
#5 추앙의 위대성 vs 추앙의 어리석음
시인 이상을 추앙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며 추앙하는 삶의 위대함과 어리석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추앙한다는 것도, 결국 자신의 결핍과 공허함을 채우려는 '패티 아줌마의 통조림'인지도 모른다.그의 문학을 진본으로 복원하려는 시도 역시 아류들이 애써 만든 짜깁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추앙하는 삶을 사는가? 추앙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추앙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어떤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할까? 많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었다. 나의 잃어버린 꽃을 나는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그것은 진짜 나만의 것인가.